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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린 지도 밖에서 걷는 아이

가이드 대신 듣기를 선택한 어느 날

by 룰루박
신비하고 차분한 '사유의 방'에서 홀로 피곤한 아이


지난 번 그토록 멋진 의정부 미술 도서관에서도 유튜브만 시청하던 아이를 그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아직 내가 시도해보지 못한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그러면서도 교육적인 그런 교집합 같은 공간이 있지 않을까 계속 생각했다. 그러던 중 넷플릭스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본 아이가 다른 건 싫지만 굿즈를 살 수 있다면 기꺼이 30분 이상 이동할 의향이 있다는 의지를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입구에서 나는 안내도를 펼쳤다. 빨간 화살표를 따라 동선을 그어가며 전략을 세웠다. 최대한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아이가 가장 원했던 굿즈 샵은 마지막 코스로 미뤄두고, 가장 유명하다는 사색의 방 반가사유상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색의 방에 들어섰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관람객들이 크게 두 무리로 나뉘어진 것 같았다. 한 무리는 나처럼 아이 방학을 맞아 온 가족들, 또 다른 그룹은 박물관 답사팀. 반가사유상을 둘러싸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특유의 고요함과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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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야?"


내 옆에 서 있던 아이의 목소리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김 빠지는 톤이었다. 꽤 오랫만에 당황스럽고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보더콜리가 양을 모는 것처럼 아이를 슬쩍 밀면서 사색의 방에서 얼른 나왔다.


안내도의 다음 화살표를 따라 고대 오세아니아 특별전으로 향했다. 예전에 모아나를 재미있게 봤던 걸 떠올리며 이번엔 분명 관심을 보일 거라고 확신했다.그러나 아이는 전시장에 입장하자마자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에 보이는 의자에 바로 걸터앉았다. '잠시 앉아 있을 테니 더 보고 싶으면 어머니 먼저 보세요'라는 표정이었다.


혼자 둘러보기를 약 10분. 아이를 찾아보니 저 멀리서 피곤에 절은 부장님처럼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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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도의 세 번째 화살표. 디지털 실감 영상관이었다. "이번엔 진짜로 네가 관심 있어할 만한 곳이야"라며 아이를 부추겼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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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해서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안 돼서 어깨가 무거워졌다. 아이가 머리를 기대고 잠든 것이다.

화면에서 화려한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건 아이의 고른 숨소리뿐이었다.


뭐가 문제일까? 내가 고른 게 다 별로인 걸까? 아니면 아이가 너무 피곤한 걸까? 아니면... 애초에 내 기준으로만 골랐던 건 아닐까? 그러다가 문득 몇주 전에 그토록 멋진 의정부 미술도서관에서도 한참 유튜브만 보다가 부대찌개를 먹으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곳에서 아이는 늘 다른 걸 하고 있었지.


'그냥 그와 비슷한 패턴인가 보다.'


더 이상 억지로 끌고 다니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아이를 깨워 "쌀국수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침부터 유난스럽게 부산 떨며 재촉해서 피곤할 텐데 바로 잠들거라 생각했다. 나는 운전하며 이종범의 스토리캠프를 틀었다. 그러자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



“엄마, 그 애니 말이야… 주술회전에서 고죠가 도메인 펼치고, 귀멸의 칼날에서 탄지로가 히노카미 카구라 쓰는 장면 있잖아!”



아이는 이종범의 스토리캠프를 들으며, 내가 전혀 모르는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추임새만 내며 운전했다. 그리고 아이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잠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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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쿠키있음)


SE-b8ba0688-0536-46bb-8873-31a6c233ea69.jpg?type=w1 타이틀 : 짝사랑


P.S 정작 굿즈는 매진이라 한 개도 못샀음

결론은 국립중앙박물관까지 가서 애 재우고 왔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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