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성실한 사람.
남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소개팅을 하고. 두 번째 만남에 남편은 다 떨어진 액센트를 끌고 와서 말했다.
차 구리다고 안 만나주는 거 아니에요?
그럴 뻔했다.
그때만 해도. 남의 시선이 중요했던 나는
심각하게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그런 차라도 있냐?
뎅.
몇 번만 더 만나봐야지.
그렇게 만남. 이 이어질수록. 남편의 진심이 보였다.
그렇게 구두쇠인 남편이. 나에겐 아끼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을 결혼하고 알았다.
그리고. 고향이 제주도인 남편의 고향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원시절. 돈이 없어서. 연구실에
야전침대를 깔고 생활했다는 것.
돈이 없다는 것. 이 얼마나 절절하게 힘든 것인지. 삶으로 겪어본 사람.
어린 시절부터. 나이 터울이 큰 형제들에게서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
막내 같지 않다.
오롯이 혼자서 성실하게 공부를 하고
회사를 다닌다.
헤비스모커였는데.
말을 내뱉고. 바로 담배를 끊어. 15년이 다 되어간다.
독한 놈.이라고 장난을 치면
그래서. 좋아?
장난을 친다.
회사가 야근이 잦아. 12시가 다 돼서 퇴근을 해도. 집에 오면. 무조건 웃고. 나와 아이에게 수고했다 말하고 안아준다.
그 치열한 회사생활에.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대단하다.
늘 칭얼대는 건 나고
미안하다. 고생이다. 말해주는 건
남편이다.
아이가 장애판정. 을 받기 전. 받고 난 후 2년 정도의 시간에. 우리는 서로의 밑바닥을 봤다.
처절하게.
때론. 내 탓으로 돌리는 함축적 은유. 그 말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
나 또한 시댁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손톱을 세운 상대는 남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팠다.
그리고. 존버는 희망.이다.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포기할 건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린 시절. 아기띠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던. 남편은. 이제 없다.
어린 시절의 아이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나보다 많이 기억한다.
힘든 일은 기억에서 삭제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좋은 것도. 괴로운 것도. 슬픈 것도, 아이에 관한 모든 추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힘들 때는 한없이 괴롭다고 한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과정. 에서 딱 한번, 남편이 죽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난. 그것을 품지 못하고.
내가 아이랑 둘이 살 테니.
너 혼자 자유롭게 살라고.
그 마음을 쳐냈었다.
친구들에게 공개치 않는 그의 마음에
화가 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남편의 슬픔의 크기가.
줄어드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아이가 무표정. 무반응일 때.
야근 후에도. 우리는 공원이라도 나가서
아이의 감각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 3년의 시간을
자연과 보냈다.
더위에 탈진한 내가 짜증을 내도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여름 두 달 동안 주말 내내. 바다를 갔다.
세 시간씩. 둘은. 바다수영을 했고
산으로. 공원으로. 수목원으로 남편은 우리를 끌고 다녔다.
이제 아이는 표정이, 반응이,생겼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인정한다.
아이의 좋아짐의 팔 할 이상, 이
남편의 부성 덕분이라는 것을,
이토록 성실한 남편이
아이의 아빠라서
나의 배우자라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