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고 우아하게 그리고 온화하게 나이 먹기로 했지만, 이대로 쭉 가자니 왠지 재미가 없어 보인다. 내면 깊숙이 숨겨둔 나만의 정체성 '광대짓'을 추가하련다.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왜 저래, 주책이다'라는 반응을 하지만 결국엔 웃게 된다.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난 돌+I다. (MBTI의 " I " 가 돌아이에 " I " 일지도)
에베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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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초 어느 토요일
구매한 옷과 신발은 찢어지지 않으면 웬만해선 나와 10년 이상 함께한다. 화장품은 토너와 수분크림을 제외하고 선물로 받거나 누군가 우리 집에 두고 간 제품을 사용한다. 그 외 액세서리는 결혼반지와 시계 빼곤 없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즐겨하는 것은 헤어컷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내 헤어는 모두 커트였고 그렇게 쭈~욱 자라와서 그런지 긴 머리스타일보다 짧은 스타일이 더 좋고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가 아침마다 두 언니들의 긴 머리를 묶고 따느라 막내인 나까지 해줄 여력이 없으셔서 나만 짧게 깎아주신 것 같다. 마당 개집 옆에서 보자기를 두르고 바가지를 뒤집어쓴 채 목욕탕 의자에 앉아있는 사진은 왜 그리도 많은지.
어떤 스타일을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들면 미용실을 예약한다. 5년째 다니는 미용실 원장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런 그녀를 믿기에 이 날도 그냥 머리나 길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카락을 정리하기로 했다. 남편 컷과 같은 날 예약이 되어 남편과 함께 미용실에 갔다.
미용실원장: 오늘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나: 음... 글쎄요. 길러볼까요?
미용실원장: 진짜요? 가능할까요?
나: 일단 지금은요.
길러보겠다는 내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 원장이다. 컬이 남아있는 부분을 없애기로 했다. 그렇게 자르다 보니 생각보다 많이 짧아졌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똘아이 광대짓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 앞머리를 조금 더 자르면 웃기겠죠?
미용실 원장: 뻗치는 머리카락이라 너무 짧으면 앞으로 나란히가 될 것 같은데요.
나: 그럼 뻗치기 전까지만 자를까요
미용실 원장: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괜찮기는.... 내가 이미 자르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하지 말라고 해도 할 나라는 걸 알고 있는 원장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자르고 거울 비친 내 모습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나는 너무 만족했고 원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핸드폰만 보던 남편이 나를 쳐다봤다.
남편: 이게 네가 원하는 스타일이냐?
나: 어. 완전
남편: 집까지 따로 가자.
미용실 원장: 아무나 어울리는 스타일 아니에요. 고객님이라서 할 수 있는 스타일이에요.
남편: 이런 머리는 아무도 안 원할걸요. 너 월요일에 출근은 할 수 있겠어?
나: 당연하지. 걱정 마시게.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없이 웃었다. 나와 남편의 티키타카에 원장도 재밌다며 소리 내 웃었다. 내 머리스타일로 두 사람이나 웃게 만들어 나 또한 흐뭇해 미소를 지었다. 내 모습을 본 딸들은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의 에드나라며 귀엽다고 한다. 10대 소녀들이 귀엽다니 나의 잇몸이 만개한다. 이 맛에 돌아이 광대짓을 한다.
머리 컷 다음 날, 일요일
원인 모를 심정지로 시어머님 막내 남동생분이 돌아가셨다. 올해 은퇴 후 이제 막 자신의 인생을 즐기시기 시작했는데, 갑작스러운 비보에 시어머님 가족들 모두 슬픔에 빠졌다. 서울에 사는 시동생은 큰 이모님을 모시고 가고 시댁과 가까운 우리가 시어머님을 모시고 장례식장에 가기로 했다.
남편: 알았어요. 일단 나랑 엄마 먼저 가보자고.
나: 갑자기 무슨 일이래. 운전 조심하고 전화해.
남편: 근데 너 어떡할래?
나: 나? 내일이나 발인날 가면 되지 않을까.
남편: 그 머리로 장례식장 갈 수 있겠어? 안 가도 되면 가지 않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 왜? 내가 부끄러운가.
남편: 거울 좀 봐라.
나: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나.
남편이 나간 뒤 나는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장례 2일째 되는 날
시댁 친가 외가 합쳐 장남인 남편 덕분에 무조건 가야 하는 가족 행사가 있다. 결혼식 돌잔치, 생신잔치, 장례식. 내 머리스타일이 삭발이라도 가발을 쓰고 참석해야 한다. 그러니 내 모습이 우습다한들 피할 수 없다. 남편도 포기한 듯 장례식장에서 하루 자고 발인까지 지내고 오자고 한다. 며칠 지났다고 내 스타일에 익숙해졌나 보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남편과 함께 시어머님을 모시러 시댁에 갔다.
나: 어머님 좀 쉬셨어요? 놀라셨죠.
시어머님:........... (아무 말 없이, 네 모습이 더 놀랍다.라는 표정을 지으심)
나: 약국에서 우황청심환 좀 샀어요. 드세요.
시어머님은 나를 한번 더 쳐다보시더니 말없이 우황청심환을 드셨다. 장례식장에 도착할 때까지 시어머님은 내 머리스타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시어머님의 형제는 오빠 한분, 언니 한분, 남동생 세분 막내 여동생 한분으로 육 남매이다. 일찍 돌아가신 셋째 남동생분을 제외하고 모두 빈소에 계셨다. 그리고 처음 뵙는 먼 친척분들도 많이 계셨다. 남편과 함께 빈소에 들어갔다. 상주와 외숙모님께 목례를 했다. 나는 고개를 들다 눈이 퉁퉁 부운 외숙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의 의도와 다르게 그분은 애써 웃음을 참으셨다. 분향과 헌화를 마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니 다들 놀란 눈으로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나는 그들에게 밟으면 터지는 전쟁터의 지뢰 같았으리라.
나는 산소같은 여자가 아니라 웃음 지뢰같은 돌+I다.
어머님의 큰 언니인 큰 이모님께서 그만 인사하고 앉아서 저녁 먹으라고 나를 부르셨다. 큰 이모님께서 계신 자리에는 어머님의 큰 오빠이신 큰 외삼촌 내외, 시동생, 사촌 시누이, 처음 뵙는 먼 친척 삼촌 두 분이 앉아계셨다.
시동생: 형수님, 마라톤 대회 때문에 이렇게 깎으신 거예요?
나: 아뇨.
시동생: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임)
큰외삼촌: 우리 OO 이는 뭘 해도 예쁘지. 한 잔 혀.
나: 네.
삼촌 1: 나는 저기 외할아버지 셋째 아들의 아들이여. 한 잔 혀.
나: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낯선 분들께서 주시는 술을 받아 마셨다. 그분들도 맨 정신으로 나를 마주하기가 어려워 술을 권하셨을까. 다들 내 헤어스타일에 익숙해질 때쯤이었다. 나를 가장 예뻐해 주시는 큰 이모님께서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를 치셨다.
순간 주위는 조용해졌고 시선은 큰 이모님과 나에게 쏠렸다. 나는 얼른 큰 이모님께 '네'라고 대답했다. 다른 분과 대화를 하시던 큰외삼촌께서 갑자기 술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시동생과 사촌 시누이는 큰 이모님께서 치매초기 진단을 받으셨다며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했다. 내가 속상할까 봐 신경 써주는 분들께는 고마웠지만 솔직히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쩌면 장례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을 큰 이모님께서 대신해주셔서 속이 시원했을지도. 그러면 어떠한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갑작스러운 가족 또는 지인의 사망소식으로 비통한 그들에게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하나로 잠시 휴식을 준 것 같아 뿌듯하고 행복했다.
나는 망가진 내 모습이 민망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팍팍한 삶에 짧게 웃을 수 있는 틈을 내가 내줄 수 있어서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다. 이 맛에 중독되어 삶의 지표를 향해 직진하지 못하고 종종 삼천포로 빠진다.
장례식 휴가 뒤 출근한 어느 날 오전
장 부장: 차장님, 무슨 일있으세요?
나: 저요? 아무 일도 없는데요.
장 부장: 아니 머리가.....
돌아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 (출처: 네이버)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인크레더블'의 에드나 이미지를 공유함_출처: 애니매이션 '인크레더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