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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san Nov 04. 2016

페루에서 온 걸리버

더불어 행복함을 고민하는 작은 거인 

마케니 캠퍼스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체구에 백인도 아시인도 아닌 것 같은 외모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한다. "안녕! 나는 걸리버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마케니에 온 걸 환영해요." 이곳에서 두어 달 생활을 했다고 선배가 다 된 듯 남편이 인사한다. 걸리버 여행기로 익숙한 이름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한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 마케니 여행을 끝내고 계속 여행기 쓸 건가요?"하고 물었더니, 걸리버는 씩 웃으며 대답한다. "정말 이름 덕분에 여기저기 끝없이 방황하고 있네요." 


그는 페루 출신으로 리마에서 농학을 전공했는데, 감자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철학과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전공을 바꾸어 다시 학사를 마쳤는데, 로타리 장학회에서 제공하는 아주 특별한 장학금을 받게 되어서 시에라리온으로 오게 되었단다. 그 특별한 장학 프로그램은 수여자가 원하는 어느 대학이든 1년간 수학을 할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간 동안의 일정 부분을 자원활동을 통해서 현지인들과 경험을 나누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했다. 과거의 이 장학금 수여자들은 하버드, 캐임브리지 등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수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신이 아프리카 대륙의 그것도 최빈곤국으로 꼽히는 시에라리온으로 가겠다고 하자 장학회의 담당자들이 쑥덕쑥덕 말도 많았다고 한다. "요즘 학생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먼, 무엇을 배우겠다고 최빈곤국의 대학에서 수학을 하겠다는 건지......"


하지만, 작은 체구의 걸리버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가난한 남미 출신으로 선진국인 미국,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경험하면서 나는 "부자나라"에 대한 환상을 버리게 되었어요. 그들이 이룩한 물질적인 풍요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정의"는 늘 가진 자의 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 최상의 교육환경에서 최고의 석학들에게 몇 수 배운다는 게, 나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의미 있게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빈곤하고 "발전"해야만 하는 아프리카에 와 보고 싶었어요." 


단기간 대학을 방문해서 한 학기 강의를 하며 자신의 현지조사를 진행하는 외국학자들이나, 중장기로 현지에 거주하거나 여러 차례 방문을 통해서 각종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활동가들과 달리 그는 현지 학생들과 함께 수강신청을 하고 같은 숙소에서 머물며 매일매일의 생활을 피부로 체험하며 모험을 시작했다. 


며칠 후, 나와 남편은 인터넷을 사용하려고 행정건물 회의실을 찾았다. 걸리버는 일찌감치 노트북을 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며칠 지내보니, 어때요?"하고 묻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석사과정의 개발학 관련 수업을 신청했어요. 듣자 하니, 조만간 언어센터 수업이 시작된다면서요? 이탈리아어 수업을 듣고 싶어요. 학부 때 전공이 농학인데, 기초학문으로 수학을 계속 공부했고 흥미가 있어서 이곳 학부생들에게 기초수학을 가르쳐주려고 해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미국에서 공부한 철학, 신학을 바탕으로 신학교(마케니 대학과는 독립된 기관) 학생들에게 철학의 입문 과정 강의를 하고 싶기도 하고......" 큰 포부와 다양한 계획을 쉼 없이 이야기하던 걸리버를 가만히 지켜보시던 노트르담 로산나 수녀님은 껄껄껄 웃으며  불끈 쥔 주먹을 아래위로 흔들며 "그에게 시간을 1주일만 줘 봅시다!(give him a week)"하고 소리치셨다.  반 평생을 시에라리온에서 살아오신 수녀님은, 갓 도착한 혈기 넘치는 청년이 앞으로 현지에서 경험할 고난과 역경의 과정들을 훤히 알고 계신 듯했다. 가슴 벅찬 계획들을 상상하고 있는 걸리버는 로산나 수녀님의 말과 제스처를 깨닫지 못했지만, 그 뜻을 아는 우리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려는데 물이 나오지 않고, 발전기가 고장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없어 저녁때는 그저 일찍 잠에 들어야 하고, 흐린 날씨 탓에 이 메일을 며칠씩 확인할 수 없는 등등.... 삶의 사소한 부분에서 비롯되는 어려움들을 겪어내고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을 걸리버의 계획들을 기대하며, 그의 오늘을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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