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 강사 발리 씨와 크리올 강사 다니엘
마케니 대학의 언어&문화센터에서 중국어 수업을 시작한다는 공고 전단을 붙이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해서 소식을 전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사무실로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중국어를 전혀 몰라도 되나요?", "마케니 대학 학생이면 수업료 없이 청강할 수 없나요?", "왜 대학의 과목으로 정해서 모든 학생들이 들을 수 있도록 개방하지 않나요?" 등등. 그중에도 대부분 학비가 없는데, 열심히 할 테니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일반 수업과 달리 외국어 수업은 배우는대로 듣고, 말하고 쓰며 연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또한 대학에 언어 수업을 위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거나, 학습자료가 풍부한 것도 아니라서 수강인원을 20명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현지의 강사들이 자주 사용한다는 "Empty sack can not stand."(빈 자루는 혼자 서 있지 못해= 교사도 배가 고프면 강의할 수 없다)라는 말로 학생들에게 대답하니, 어떻게 무료로 수업을 들어보려던 학생들이 씩 웃으며 사라졌다.
하루는 사무실에 양복차림을 한 중년의 남성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발리입니다. 언어 수업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하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현지인이라고 생각하고 악수를 하며, "네, 잘 찾아오셨어요. 중국어 수업을 듣고 싶으신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손에 들었던 낡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며 내놓는다. "아, 저는 중국어 수업을 수강하려는 게 아니라.... 불어 수업을 제안하러 왔습니다." 발리 씨는 스스로 봉투에서 자료를 꺼내어 나에게 건넨다. "여기 제 자료가 다 들어있습니다. 저는 성요셉(st. Joseph) 중학교에서 불어를 가르치고 있답니다. 불어 수업을 열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너무 당당하게 요청을 하는 그에게 한마디로 거절할 수 없어, 현재 사정을 설명했다. "발리 씨, 사실 언어센터의 중국어와 이탈리아 수업은 첫 시도여서 수강생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또 수강료는 교재와 오디오 등 수업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하는 데 사용할 계획이어서 강사료가 넉넉하게 책정되어 있지 않답니다." 실제로 이탈리아어 강의를 맡기로 해 준 소냐와 알리체는 강사료를 받지 않고 대신 중국어 수업을 청강하기로 했다. 중국어 수업은 나와 남편이 맡게 되는 경우 따로 강사료를 받지 않을 계획이었고, 혹시 중국 유학파 현지 교수가 강의를 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강사료를 시간당으로 계산해서 지급할 계획이었다. 발리 씨는 해맑게 웃어 보이며 "강사료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학생을 모집해 주시면 그 상황에 맞추어 다시 논의해 보고요." 발리 씨는 "메르씨 복구(Merci beaucoup), 오르 보아 마담(au revoir Madame)"하고 인사하며 서류를 두고 사라졌다. 발리 씨는 시에라리온의 이웃나라인 기니(Guinée)*사람으로 왕년에는 프로축구 선수로 활약했단다. 그런 까닭에 꽤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가 보았는데, 은퇴 후에 불어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단다. 어쨌든 발리 씨 덕분에 언어센터에는 중국어, 이탈리아어에 이어 불어 수업이 생겼다.
며칠이 지나고, 대학의 직원인 다니엘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기는 하지만, 특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어센터에서 중국어, 이탈리아어, 불어도 개설한다고 소식 들었어요. 나도 이탈리아어 공부를 앞으로 할 생각이에요." 이 친구도 언어 수업을 수강하려는 건가 싶어서 "그럼, 이탈리아 수업 수강해요. 대학 직원은 할인 혜택도 있는데..."하고 설명을 했는데, 다니엘은 이내 화제를 바꾼다. "아, 바로 수업을 시작할 상황은 아니고.... 그것보다도 크리올(Krio) 수업을 열면 어때요?"
시에라리온에는 17개에 달하는 서로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는데 물론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와 풍습도 다 다르다. 마케니 지역에는 테므네(temne)와 림바(Limba)라는 종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크리올(krio)은 주로 수도인 프리타운에 살고 있다. 초기 유럽인들과의 접촉으로 언어적으로도 유럽어와 많은 관련이 있고, 소수이지만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들의 언어는, 영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현지 공용어였다. 다니엘은 종족으로는 림바에 속하지만, 중학교에서 역사와 크리올 과목을 가르친다고 했다.
다니엘은 현지에 단기, 장기로 파견되어 있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크리올 수업을 개설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과거 내전(1991-2002) 당시 반군의 기지였던 마케니에는 많은 NGO의 자원봉사들이 파견되어 있었고, 이들은 현지에서 각자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크리올을 많이 배우고 있었다. 영어가 공용어이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크리올과 영어를 자연스럽게 섞여서 이야기했다. '나부터 등록해서 크리올을 배워야겠다.'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였다. 다니엘을 강사로 해서, 크리올 수업을 언어센터의 과목에 추가시켰다. 학생 모집 공고도 서둘러 출력하고, 현지 초등, 중등학교에서 사용하는 크리올 교재도 마련했다.
제 발로 찾아온 두 강사들 덕분에, 마케니 대학의 언어&문화센터는 중국어, 이탈리아어와 함께 불어와 크리올어가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수강생들을 기다리며 개강의 날을 하루하루 기다리게 되었다.
*기니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