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코(Stocco), 마케니(Makeni), 시에라리온(SL)
달 밤의 사파리와 초원의 뜨는 붉은 해돋이를 보고 마케니(Makeni)에 가까워지자, 길 가에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마다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물통을 머리에 이고, 등에 아이를 업은 여인들이 종종걸음으로 줄지어 걷는다. 한편, 가득 찬 물 통을 머리에 이고 들통을 양 팔에 나누어 든 아낙들은 서서히 움직인다. 아마도 물의 무게가 만만치 않게 무겁겠고, 빨리 걷다가 뚜껑 없는 용기의 찰랑거리는 물이 쏟아질까 조심하는 것 같다. 엄마를 따라나선 아이들도 보인다. 예닐곱 살짜리 아이들도 손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양동이가 들려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들의 활기차고 분주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현듯 걱정이 엄습한다. "설마 나도 아침마다 저 대열에 끼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 집에 수도시설은 구비되어있을까?", "화장실은......?"
마케니 대학(University of Makeni)에서 1년 근무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우리가 요구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학교 측에서 현지 기준의 월급을 제공할 것.
둘째, 근무하는 동안 집을 제공할 것.
셋째, 현지에서 질병이 발생할 경우, 의료시설을 제공할 것.
머무를 집이 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2명의 대학강사의 월급으로 일상생활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예측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두 살이 지난 아들 안토니오가 다닐 유치원이 있는지도 함께 문의했는데, 학교 측에서 모든 조건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월급은 우리가 현지에 도착해 구체적으로 논의를 하기로 했고, 집은 학교 사택이 제공되며, 마케니대학은 가톨릭 재단의 사립대학인데, 같은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과 유치원이 있으니 의료와 교육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다른 걱정 없이 오른 길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월급이 구체적으로 얼마인지, 어떤 집에서 살게 되는 것인지, 병원과 유치원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잇~,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후면 알게 되겠지.' 사실 지금 걱정을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밤의 사파리에 흥분했던 부자는 차 안에서 코를 이중창으로 골며 곯아떨어졌다.
이윽고 차는 보초가 서 있는 커다란 철문을 통과하여 파란색 집 앞에 도착했다. 집 안에서 한 청년이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청년은 다가와서 짐을 함께 내려주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잘 오셨어요. 저는 마케니 대학에 근무하는 루이스(Luis)라고 해요. 오늘 도착한다고 해서 집을 정리해 놓았어요. " 루이스는 우리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단층으로 지어진 집의 출입문은 단단한 회색 철문이었고, 안으로 들어서니 옅은 갈색 타일이 깔린 널찍한 거실이었다. 벽마다 창이 있어서 집이 환했고, 식탁과 의자 4개, 나무로 짜인 장 하나가 거실에 놓인 가구의 전부라서 더 훤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침대와 책상, 의자 그리고 옷장이 구비된 방이 세 개 있었고, 수세식 변기와 세면대가 설치된 화장실이 각 방에 설치되어있었다. 방마다 창이 두 개씩 있어서 빛이 잘 들었고, 부엌에만 창이 없이 바깥으로 통하는 철문이 있었다. 부엌과 화장실에만 나무 문이 달려있고, 나머지 방들은 문이 없이 열려 있는 구조였다. 루이스는 각 방문과 창문에 가림막과 커튼을 막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거실에는 작은 벽장도 설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방마다 벽에 설치된 전기 스위치와 콘센트, 그리고 수세식 변기와 수도꼭지였다. 전기 스위치와 수도꼭지가 있다는 건, 전기와 물이 나온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슬며시 수도꼭지를 돌려 보니, 물이 쫄쫄 흘러나왔다!
"각 방에 모기장 설치하러 오후에 한 번 더 올 거예요. 더 필요한 게 있나요?"루이스가 말했다.
"안토니오는 모기장 텐트를 가져왔고, 우리도 큰 모기장을 가져왔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이인용 침대에 설치할 모기장을 한국에서 가져온 터였다. "일반 모기장이 아니라, 말라리에 예방 살충제가 뿌려진 모기장을 사용해야 해요." 루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말라리아는 현지에서 가장 흔한 질병이라서, 시에라리온으로 오기 일주일 전부터 우리는 말라리아 예방 알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살충제가 뿌려진 모기장은 사용하기 전에 통풍이 잘 되는 야외에서 반나절쯤 걸어놓아야 한다고 루이스가 얘기해 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주세요."라는 그의 물음에 나는 "돈이 필요해요. 은행에서 환전을 해야겠어요."하고 대답했다. 시에라리온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한국이나, 유럽에서 잘 취급하지 않아 우리는 달러와 유로만 소지하고 있었다. 살림살이며, 생필품, 당장 식품과 물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다. "일단 은행에 계좌를 열고, 환전을 하면 더 우대를 받을 수 있어요. 계좌를 개설하려면 거류비자와 행정적인 서류도 있어야 하니, 은행은 요 며칠 내로 가시고, 필요한 물건을 알려주세요. 대학에서 제공할 수 있습니다." 돈을 당장 바꿀 수 없다면, 필요한 건 마실 물과 음식이었다. 루이스는 오후에 빵과 먹을 물 등을 사다 주겠다며 집을 나섰다.
루이스가 나가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좋은데?"내가 남편을 보며 말했다. "그래, 화장실이 세 개나 되는 집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야." 안토니오는 벌써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장난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난 매일 아침 아프리카 아낙들이랑 물 길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엄청 걱정했어!"내가 걱정을 털어놓자 남편을 껄껄 웃으며 "난 장작 패러 가고?"하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돌연 창 없이 깜깜한 부엌이 떠올랐다. 부엌에 들어가서 바깥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자, 그제야 빛이 들어와 부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수도꼭지가 설치된 개수대가 한쪽에 덩그러니 있고, 옛날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집 욕실에서 보았던 하얀색 타일의 조리대가 그 옆에 붙어 있었다. "여기가 부엌이야? 아무것도 없는데?" 의례 부엌 하면 떠오르는 냉장고, 가스레인지, 싱크대 등 어떤 요소도 갖추지 않은 그냥 빈 공간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늘 밥은 어떻게 해 먹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남편은 바로 한국에서 사 온 정수기를 꺼내서 설치할 곳을 찾고 있었다. "일단 물을 정수할 필터를 달아야겠어. 루이스한테 우리가 가져온 버너에 맞는 가스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남편은 시에라리온에 오기 전, 현지에 살고 있는 사업가, 외국 자원봉사자 등의 개인 블로그를 검색하고 때로는 이메일도 주고받으며 주의사항, 준비해야 할 물건 등을 체크하며 나름 꼼꼼히 준비를 해왔다. 오지탐험용 정수기, 태양열 충전 가능한 렌턴, 헤드렌턴, 코펠과 버너, 모기장 텐트, 각 종 비상약...... 여기에 안토니오가 크리스마스 때 이탈리아에서 받은 원목 기차놀이 세트가 더해져 우리의 짐은 일인 수하물 기준을 훌쩍 초과했었다. 장작을 구해서 불을 피워야 할지 컴컴한 부엌을 동굴 삼아 원시인의 원초적인 고민에 동참하고 있을 때, "빵빵!" 집 밖에서 경적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