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에서 핸드메이드 상품을 판매했다. 수많은 공예가, 디자이너들을 알게 됐는데 그중엔 또래 작가들도 많았다. 대부분 1인 브랜드. 혼자 디자인하고 만들고 판매, 홍보까지 도맡아 했다. 그들은 명함 하나도 허투루 만들지 않았는데 그것을 받아 들 때마다 종이의 질감과 디자인, 글씨체까지 뜯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존경스러울 만큼 부지런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물건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터. 판매처인 우리가 제대로 홍보하지 못한 탓도 있고, 양산품과 비교해 가격이 비싼 이유도 있었다. 공예품, 디자인 상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부족했고, 드물게는 기능과 완성도가 떨어지는 물건도 있었다. 결국 물건을 반품하는 일이 늘어났고, 돌려주는 사람이나 돌려받는 사람이나 민망하고 겸연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후 회사수익이 떨어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권고사직을 받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소비에 지쳐버린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한 건 최근 <물욕 없는 세계>를 읽으면서다. 유례없는 저성장 시대에 물건으로 자기과시를 하거나, 혹은 개성을 드러내는 일이 도리어 피곤하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무리 섬세하고 멋진 도자컵이 있어도 무언가를 추가로 사들이는 데는 망설여지는 것이다. 장식적 럭셔리의 시대도 끝났지만, 취향 소비라는 것에도 얼마간 진이 빠졌는지 모른다. '어찌 됐든 최소한의 물건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2010년 일본에서 지독히 가난한 유학생활을 보냈다. 설거지용 세제가 줄어들 때마다 근심하던 기억이 난다. 학교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훔쳐다 쓸 정도로 생활비를 아꼈다. 그러나 고작 1년의 유학생활에도 기숙사 방을 정리할 때는 한가득 쓰레기가 나왔다. 식기부터 조리도구, 잡지, 전기장판, 화분 등 처분해야 할 물건들이 어찌나 많던지. 애써 외면해온 부채의 실체를 마주한 것처럼 뜨악하게 몸서리쳤다. 늘 바라던 것은 가뜬하고 경쾌한 삶이었는데 이렇게나 많이 끌어안고 살았다니. 지인들에게 물건을 나누고도 몇 번이나 쓰레기 봉지를 날랐을 때는 마치 도망가는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다.
한국에 88만 원 세대가 있다면 일본에는 사토리 세대가 있다. 사토리는 '깨달음, 득도'라는 의미인데, 득도한 사람처럼 욕심이 없는 젊은 세대를 말한다. 돈과 출세에 관심이 없고 무리해서 자동차, 사치품, 해외여행을 구매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적인 것이 아닐까. 부모세대가 크고 둥근 와인잔, 입이 좁고 긴 샴페인 잔,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크리스털 잔을 갖가지 모양으로 진열해 모았다면, 그 자녀 세대들은 무늬 없는 유리컵 하나에도 만족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물도 따라 마시고 주스도 따라 마시고 심지어 와인을 따라 마시는 데도 개의치 않는다. 요즘은 옷도, 차도, 심지어 집도 공유하는(에어비앤비) 시대다. 이렇듯 갈수록 소유 개념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생산자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변화를 피할 순 없다는 것이다.
조금 뜬금없지만 내가 요가에 끌렸던 이유도 그 '슈퍼 심플함'에 있는지 모른다. 요가처럼 홀가분한 수련, 운동이 또 있을까. 도무지 필요한 물건이란 게 없다. 매트와 블록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에 대해 '그럭저럭 괜찮은 운동화와 도로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요가는 이마저도 필요 없는 것이다. 오직 혼자서 두 팔, 두 다리 뻗을 공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여기에 근심, 걱정, 아집과 두려움까지 (가능하다면 군살도) 탈탈 털어버리는 게 요가다. 얼마나 홀가분한가. 어쩌면 요가야말로 이 ‘물욕 없는 세계’에 가장 최적화된, 지속 가능한 운동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요가복을 하나 더 사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는 참- 아이러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