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가 왔다. 통보도 없이 시나브로 스며들었다. 아직까지 찾아올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몸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몇 년이 되었는데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 갱년기를 어떻게 쫓아낼까 궁리 끝에 어디론가 떨쳐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 벽두에 바로 보라카이 섬으로 향했다.
코코넛 향기를 품은 바람결이 내 귓불을 스쳐간다. 세계 3대 비취인 보라카이 섬에서 모래사장을 맨발로 뛰었다가 걷다가, 걷다가 뛰기를 반복했다. 파도치는 소리를 듣고 해변을 거닐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만 봐도 나쁜 액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태풍이 몰아쳐서 보라카이 해변은 난리가 났다. 파편이 떨어지는 소리와 천둥번개가 요란을 떨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다음날, 거칠었던 태풍이 지나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은 맑고 투명한 햇살이 가득했다. 흐렸다 맑아지는 하루는 내 기분과 똑같았다. 하루의 스케줄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비 온 뒤의 습습한 골목으로 가이드를 따라 움직였다.
다이빙할 사람들에게 십 분 정도의 짧은 이론 교육이 있었다. 풀장에서는 실제로 연습을 하고 물에 자신 있는 사람은 산소통을 업고 바다에 뛰어들기로 했다. 다이빙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5미터 아래의 바닷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더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지금 안 해 보면 언제 해 볼래?”
물갈퀴를 신고 산소통을 매던 남편이 한 마디 던졌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소리라고 여겼다. 내가 물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사춘기보다 무섭다는 갱년기를 떨쳐 내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물과 친하지 않았던 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만 봐도 즐거웠다. 혼자 노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랫동네에 사는 순이가 물놀이를 하자고 꼬드겼다. 수영도 가르쳐 주겠다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친구의 손을 잡고 물놀이를 즐겼다. 물장구를 치고 두 손 가득 모은 물을 친구에게 던지기도 하면서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물놀이에 빠져서 정신없이 놀고 있을 때 깊게 파인 물속에서 나는 그만 발을 헛디뎌 허우적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물이 꽤 깊지도 않았을 텐데 겁부터 나서 허우적거리다가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아이들은 ‘사람 살려주세요.’ 소리를 쳤고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가 나를 건져냈다. 그 후 물만 보면 깜짝 놀랐고 티브이 속 바다만 봐도 악몽이 살아났다.
모두가 바닷속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산호를 보겠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많다며 그중에서 니모가 살고 있는지 찾겠다는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문득, 쉰의 중반이 넘도록 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해 보고 싶어졌다. 기회였다. 할 수 없다는 마침표를 쉼표로 바꾸고 싶었다. 해 볼까. 아니야, 난 할 수 없어.‘한다.’와 못한다.’ 사이에서 내 마음은 저울질을 했다. 지금 미루고 나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다 깊숙이 들어가서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빠져 죽으면 어떻게 하지. 내 안에 있는 마음과 바깥의 나는 오락가락했다. 그래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해보자. 연습할 땐 겁부터 났고 엄지와 검지로 코를 막고 입으로 숨 쉬는 것도 힘들었지만 마음을 정하고 나니 편안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멈춰 섰다. 햇살은 눈부셨고 파도는 잔잔했다. 내가 의존할 곳은 산소 통 하나였다. 수경을 끼고 산소호흡기를 꽂고 등에는 산소통을 맸다. 배 끄트머리에 앉았다. 누군가 바다를 향해 밀치는 순간 나는 물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바다 한가운데 어디선가 정신을 잃은 듯 아찔했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멈췄던 들숨날숨을 쉬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수많은 고기떼들이 파도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었다. 산소통에서는 쉼 없이 물방울이 터져 나왔다. 환영이라도 하듯 형형색색의 고기들이 나를 에워싸면서 지느러미를 살랑살랑거렸다. 축제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바다 깊은 곳에 들어와야만 볼 수 있는 산호초도 눈부시게 빛났다. 아름답고 황홀한 풍경이었다.
어렸을 적 콤플렉스 때문에 물과 멀리했던 지난날이 아쉬웠다. 물을 피하기만 하고 도전해볼 생각은 왜 안 했을까. 갱년기를 극복하기엔 아직도 힘이 든다. 하지만 피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면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