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도 파스칼도 킹 목사의 것도 아니면서 맴도는 말들이 있다. 단순한 진실을 갖춘 말들. 어딘지 모를 곳에 박혀있다가 겉보기에 무관한 (부적절한) 때에 돌출되곤 한다. 자주 그런 말들을 생각한다.
이를테면 “빚이 너무 많아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말. 팔순의 노부모와 그 자제들인 중년의 남매가 고속도로에 선 차 안에서 질식한 채로 발견되기 전, 그중 아들 되는 이가 했다는 말이다. 한탄도 절규도 아닌 것. 낡은 수도꼭지나 마모된 타이어를 두고 할 법한 진술. 그 이상 할 수 있거나 해야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구멍이 뚫린 타이어는 구멍이 뚫린 채로 폐기되고, 갚을 수 없는 빚을 짊어진 사람은 깔려 죽는다. 그런데 죽는 일은 타이어를 갈아 끼우듯이 그렇게 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만큼 산 사람들의 자살이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의 자살은 어쩌면 오류이기에. 수능 시험을 망쳤다든가 실연을 당했다든가, 되돌아보면 별 것도 아닌 실패에 죽는 것. 그것은 판단 착오다. 인생에는 그보다 큰 고난이 많으며 그런 것들 중에도 견딜만하고 견뎌야만 하는 것들이 많으니.
반면 생의 어떤 지점을 통과한 이들은 죽어야 할 만한 일들과 아닌 일들의 차이를 안다. 그것을 알고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시련을 겪을 만큼 겪었다면, 시험에 통과한 셈으로 치고 평화가 찾아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일은 없다. 역경은 끊이지 않고 갈수록 힘에 부칠 것이고, 피터 드러커의 말마따나 ‘사회로부터의 구원은 없’다.
이런 다소 멜로드라마틱한 상념들 사이 마을버스 기사는 급브레이크를 밟고, 경적을 울리고, 욕설을 내뱉다가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굼뜬 승객과 더딘 앞차에, 너무 빠르게 바뀌거나 너무 느리게 바뀌는 신호에. 나는 오늘 느낀 사소한 불안, 희망, 질투, 수치, 우쭐함, 열패감에 불쾌감을 더하며, 이런 소박한 굴곡들을 훗날 찾아올 고난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한 훈련으로 생각하게 된다. 벼랑 끝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아는 일 말이다. 삶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으며, 침몰을 받아들이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