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이 아닌 도전으로 삶을 건강하고 즐겁게 만듭니다.
시를 읽고 쓰며, 한참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어떤 사유가 적당할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별과 바람, 그리고 모래알이라는 통속적이 상징, 바닷가 모래알만큼 별들의 반짝거림도 익숙한 문장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십 수 년 시를 읽으면서, 읽어 온 문장의 레퍼토리는 내 머릿속으로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이지만, 무엇이 새롭고 괜찮은 문장인지는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증명과 풀이이며, 문학은 언어의 재구성일 뿐입니까.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그렇습니다. 천문학은 끊임없이 별들을 관찰합니다. 새로운 별들을 발견하고 그 생성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천문학의 의미입니다. 아무리 천문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천문학이 별에 집착하도 단 한 개의 새로운 별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집착이란, 가능한 일과 가능하지 않는 일의 기준점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람의 의지를 말하기도 합니다. 천문학자가 별을 탐구하지 않고, 별을 만들어 내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것은 집착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시인이 기존 언어를 재구성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탐구하거나 만들려고 한다면 집착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도전을 집착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현 불가능하다고 해도 시인이 인류 역사에 남겨질 시를 쓰고자 하는 것, 천문학자가 외계 은하계 행성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다만,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의 힘든 도전은 집착과 비슷한, 누군가의 비웃음을 자아내는 일 일수는 있습니다.
같은 일에 도전하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겐 도전이 되고 누군가에겐 집착이 됩니다. 수십 년 동안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문청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만약 그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신춘문예에만 매달리고 있다면, 만약 그가 언젠가 당선의 결과를 얻는다고 해도 집착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 반대로 열심히 삶을 살면서 도전하는 것이라면 결과에 상관없이 도전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도전과 집착을 구분할 수 있는 ‘삶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하여 어느 하나의 결과에만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이란 내 삶의 균형까지 망가뜨리면서 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균형 잡힘과 그렇지 않음을 설명하기 다소 모호한 부분은 있겠지만, 보편적 삶의 가치관에서 바라볼 때, 다수의 사람들이 괜찮다고 간주한다면 균형 잡힘이 맞습니다.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 등이 보편적 삶의 가치관에 포함되는 일이겠죠.
수시로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나의 집착 때문에 균형이 깨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때로 세계적인 문학작품을 쓰는 것 보다, 새로운 외계 은하의 별 한 개를 발견하는 것 보다 내 삶을 둘러보고 내 가족을 둘러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발견, 세계적인 문학작품, 세기적인 논문들이 누군가의 불행을 기반으로 한다면, 저는 그 발견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와 내 주변의 삶, 그 소중함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계간 시인시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16년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시인동네, 2016년)를, 2020년 위로의 시편을 담은『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걷는사람, 2020년)을 출간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한편의 짧은 산문을 씁니다. 50여편 정도의 산문을 모아서 산문집 출간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