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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현수 Apr 10. 2017

은자

그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가 산에서 처음 목격된 것도 10년 전이다.


그를 처음 발견한 것은 마을의 심마니였다. 약초를 캐던 도중 낭떠러지에서 구르는 바람에 발목을 삐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풀숲을 헤치고 그가 나타났다. 


심마니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날도 어두운 데다 그의 모습이 도통 보통사람과는 달랐는지라 인간이 아닌 유인원인 줄 알았다고 한다. 혹 해코지라도 할까 두려워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기에 기겁했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얇은 바지만 하나 달랑 걸치고 있었는데 머리는 온통 풀어헤치고, 얼굴과 몸은 볕에 그을렸는지 아주 검은 편이었으며 비쩍 말라서 피골이 상접했다. 그러나 그런 몰골인데도 악취는 전혀 나지 않았고, 눈이 맑고 초점이 또렷한 데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악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물론 사람이었으며, 조용하지만 울림이 있는 또렷한 목소리로 정중히 말을 건넸다고 한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이미 해가 져버렸던 지라 마을로 내려가기엔 늦어버려 심마니는 그의 거처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산속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토굴이었다. 그는 심마니의 발목을 이런저런 약초를 이용해 치료해주고, 어디선가 천 조각까지 가져와 단단히 감아주었다. 그리고 버섯과 약초를 넣은 일종의 국 같은 것을 끓여주었는데, 맛은 쓰고 역했으나 배가 고프고 몸이 차서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내내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식사를 마친 뒤 심마니는 조심스레 그에게 왜 이런 곳에 사는지 물었고,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심마니는 다음날, 무사히 산에서 내려와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날로 집과 재산을 정리하고, 심마니 일도 관두었다. 정리한 재산은 모조리 저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며 촌장에게 맡기고 바람처럼 마을을 떠나버렸다.


촌장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그에게 묻자 그가 답하길 “평생 모시고 존경할 스승을 찾았다.”며 그 스승이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일단 그를 찾아갈 거라 말했다. 그를 통해 자신이 심마니로서 쌓은 명성과 그간 모은 재산들이 참으로 거추장스럽고 무의미하다는 깨달음만은 얻었으니 앞으로도 자신은 욕심을 버리고, 사색을 벗 삼아 남은 생을 살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촌장의 거듭된 물음에 그는 끝내 산속의 토굴에 사는 그에 관해 털어놓게 되었고, 그때부터 마을에 그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은둔하며 사람을 피했으나 사람들은 종종 산에 올라가 그를 만나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가 숨어 다니는 바람에 산에서 그와 마주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원체 많은 이들이 산을 드나드는 바람에 한, 두어 마디씩 그들이 묻는 질문 혹은 고민에 대한 답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절대 말을 길게 하는 법도 없었고,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그의 명성이 이제 산골마을을 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방송국에서 취재를 오기도 했으나 그럴 때면 그는 귀신 같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방송에 출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현인이며 은자라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심지어 그를 따르겠다는 제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모여들어 산 어귀에 새롭게 작은 마을이 하나 조성되었을 정도였다. 마을의 이름은 제자촌으로 불렸다.


그의 가르침에 따른 제자촌 사람들은 세상과 등을 지고 재산을 모으지 않으며, 각자의 집에서 홀로 작은 텃밭을 일궈 자급자족하면서 고독한 여생을 보내려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말이 제자지 그는 단 한 번도 제자촌에 내려온 적도 없었고, 그 제자들이라 자처하는 자들에게 대단한 가르침을 준 적도 없었다. 하여간 그가 세상에 알려진 10년에 이르는 지금까지 그와 가장 긴 대화를 나눈 것은 오직 처음 그와 하룻밤을 보낸 심마니뿐이었고, 지금 심마니의 행방을 하는 이는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산에서 내려왔다. 몰래 산을 빠져나갈 요량이었는지 깊은 새벽에 홀로 총총히 산을 내려오는데, 그만 제자촌 사람에게 그 모습이 발각됐다. 제자촌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그에게 어딜 가느냐 물었다.


그는 이제 산을 떠날 생각이라 말했다. 제자촌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달리 이유는 없다고 답하더니 되물었다.


“그나저나 당신들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여기 머물고 있습니다.”

“전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준 적이 없습니다.”

“스승님이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남긴 말씀들로 충분합니다.”

“전 누구의 스승도 아닙니다.”

“네. 하지만 우리는 스승으로 모시렵니다. 우리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아 욕심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고뇌와 고통의 근원이 다름 아닌 욕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고독과 사색만이 참된 자아를 찾는 길이며 재물과 명성과 명예는 헛된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내 진리이지 당신들의 진리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저희는 덕분에 안정과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랬다 해도 나를 스승으로 삼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살아가는 방식 때문에 오해를 산 모양입니다.”

“허나 욕심이 없지 않고서야 어찌 선생님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저야말로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네?”

“나는 내 존재가 부담이 됩니다. 고뇌와 고통에서 진정으로 벗어나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리 사는 것뿐입니다. 또한 내가 당신들의 스승이 아닌 것은 진리를 스승이나 책에서 구하려 들지 말고 제 안에서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갖춘 고등한 동물이며 제각각 겉모습도 그 내면도 다른 모양새로 태어납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제각각의 진리를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날 스승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나의 진리를 마치 자신들의 진리인 냥 떠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물론 고독과 사색과 절제가 당신들에게 정말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힘들고, 잠깐이나마 사람이, 재물이 그리운 마음이 든다면 당장 당신이 원하는 걸 찾아 떠나십시오. 그게 당신의 진리를 찾는 길입니다. 불필요한 고행으로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 재물을 원하는 자나 고독과 사색을 원하는 나와 의욕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저 요즘 세상에서 나와 같은 자는 희소하고 재물을 원하는 자들은 많다는 차이 외에 무엇이 다르냐? 이 말입니다. 중요한 건 오직 누군가의 발자취를 졸졸 따르는 게 아니라 제 길을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뿐입니다.”


누군가 또 뭔가 말을 꺼내렸는데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더니 성큼성큼 몰려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리곤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제자라는 이들은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 순간, 대부분 제자들의 눈엔 스승에 대한 여전한 존경과 사랑이 담겨 있었지만, 몇몇의 눈엔 연민이, 분노가, 시샘이, 야릇한 증오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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