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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정 Oct 26. 2017

백수가 된 딸의 고백

퇴사일기, 열한 번째 : 다시 출발하는 법을 배운다

어머니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

나는 무뚝뚝한 딸이다. 다른 딸들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 거의 매일 통화를 하고 친구처럼 지낸다는데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인 그런 딸이다. 무관심이라기보다 부모님은 항상 나의 선택을 지지해줬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진로 선택을 스스로 했다. 내가 갈 학원도, 학교도, 지원할 학과도 전적으로 내 선택에 의해 이뤄졌다. 어머니는 가끔 다른 의견을 말하시긴 했지만, 언제나 난 先선택 後통보였다. 취직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내가 PD가 되고 싶어 하던 걸 원하지 않았다. PD 공채에 여러 차례 떨어지고, 연예부 기자가 된 것도 분명 원하지 않던 모습이리라. 그럼에도 부모님은 내 이름을 검색해 기사를 찾아보고, 내가 참여한 잡지도 직접 사 모으시는 등 묵묵히 딸을 응원했다.


이런 딸은, 퇴사에 대해서도 물론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았다. 첫 번째 퇴사도, 두 번째 퇴사도 마치 자랑하듯 “엄마, 나 사표 냈어!”라고 말했다. 그땐 내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있어서 퇴사와 내가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사표를 냈다는 그 자체가 인생의 이벤트였다. 첫 번째 퇴사는 일종의 FA 대어가 되겠다는 근자감이 든 객기였다. 두 번째 퇴사는 나와 회사의 방향성과 정체성의 명백한 차이로 인한 적성 찾기의 과정이었다. 두 번의 퇴사를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어울리는지 나름대로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작아진 건 세 번째 퇴사를 앞두고다. 세 번째 회사는 뚜껑을 열어보니 겉만 번지르르한, 이제는 그마저도 아닌 썩아가는 생태계를 상징하는 표본이었다. 첫 번째 회사에서부터 불만을 대놓고 말하던 ‘유별난 아이’인 나는 결국 세 번째 회사를 버티지 못했다. 결국 연예부 기자를 아예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이전 두 번의 퇴사는 커리어 발전을 위한 과정이 아닌 연이은 실패 중 하나가 됐다. 


연이은 실패.. 언제나 당당하게 선택했던 나는 처음 제대로 맛본 실패 앞에서 무너지려 했다. 부모님에게 “사표 냈어!”가 아닌 “사표 냈어....”라고 말해야 하는 못나고 부끄러운 딸이 된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오랜만에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는 어떻게 알았을까. 아직 사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때 엄마는 “요즘 힘드나”라고 말했다. 그 한 마디에 나는 터져버렸다. 그렇게 전화기를 잡고 수십 분 동안 울었다. 어머니는 한참을 듣더니 “니가 지금까지 인생이 잘 풀리고 편안하게 살았재.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다. 너무 못난 생각 하지 말고 지금까지 잘했으니 엄마는 응원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그만두고 지금은 40일간의 캐나다 여행을 하고 있다. 부모님은 돈도 벌지 않고 또 여행을 떠난 이런 딸이 걱정되리라. 딸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부모님도 별 일 없이 산다.    


최근 본 가수 휘성의 인터뷰에서 본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그는 “데뷔하자마자 1등을 했어요. 과정 없이 손만 대면 잘 됐죠. (중략) 누군가 자동차를 만들어 출발 지점에 섰어요, 열심히 만든 차가 나가니까 ‘간다! 간다!’하고 좋아하죠. 그러다 차가 멈춰요, 과정을 겪은 이들은 자기 손으로 고칠 수 있어요. 자동차 상태를 확인하고 나사도 조이면서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하죠. 반면 완성된 자동차가 눈앞에 놓여있었던 저는 그냥 엑셀을 밟았어요. 빠르게 달리더군요. 거기에 익숙해졌다는 거죠. 그렇지만 자동차가 멈췄을 때 다시 출발하는 법을 몰라요. 이런 게 저의 판타지예요, 언제든 출발하면 갈 수 있다는.”이라고 말했다. (휘성 "판타지를 깨고 '나'를 찾자" (인터뷰)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325122 텐아시아)  


휘성만큼 대단한 1등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은 휘성처럼 엑셀을 밟자마자 속도가 높아지는 자동차와 같았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았고, 학창 시절 공부도 잘했고, 큰 시련 없이 순탄한 삶을 살았다. 지금 떠난 이 40일의 여행도 어떤 사람은 갖지 못하는 큰 행운이다. 덕분에 나는 다시 출발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듯이 지금의 실패는 훗날의 거름이 되리란 믿음, 부모님 덕분에 생겼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삶 속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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