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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30. 2024

엄마들의 걱정, 한글 깨치기

다행히 비가 오다 그쳤다. 

창문을 내다보며 야외 학습을 가늠하던 아이들과 내 표정이 환해진다. 

화단 주변에 작은 웅덩이가 있고, 흙이 젖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개미 대신 지렁이를 보면 된다. 

아이들에게 우리 학교 곳곳에 있는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주의할 점은 없을까 느긋하게 질문하는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마음이 바쁘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된다고, 안전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친다. 

종합장과 연필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자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나래원으로 일단 뛰어간다. 

삼삼오오 모여 관찰하고 이름을 쓰던 아이들에게서 "꺅!", "으악!"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비 온 뒤라, 땅 위로 올라온 수많은 지렁이들이 아이들과 만나는 중인가 보다. 



'자연 지도 그리기'가 오늘 주제다. 

일반적으로 생태 지도라고 하지만, 말이 어려워 쉽게 풀이한 것이다. 

학교에는 나래원과 가람원 두 개의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소나무, 불두화, 수수꽃다리, 산철쭉, 맥문동, 비비추 모과나무, 살구나무, 목련나무, 산수유... 꽤 많은 식물이 잘 가꾸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 개미, 공벌레, 지렁이, 지네, 애벌레 등이 어울려 살아가며 

작지만 아름답게 생태 환경을 이룬다. 

가끔 가까운 비슬산에서 놀러 온 산새들이 나무 위에서 쉬다 노래한다. 

다만, 주차장에서 나래원을 거쳐 유치원 쪽으로 가는 차가 있을 수 있어, 나는 길목에 서있다. 



누가 내 팔을 꼭꼭 찌른다. 

돌아보니 종민이다. 

종민이가 "선생님, 이 꽃 이름은 뭐예요?" 묻는다. 

어느새 맑게 갠 하늘이 담겨 있는 종민이의 큰 눈동자가 시원하다. 

"베고니아" 

나래원 안으로 차가 다니지 못하게 놓여있는 큰 화분에 심겨있는 꽃이다. 

'베'를 못쓰고 있기에 내가 종합장에  '베'라고 써준다. 

이어 뭉툭한 연필을 꾹꾹 눌러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며 '고', '니', '아'라고 쓴다. 

종민이의 종합장에는 크고 삐뚤삐뚤하게 '개미'가 쓰여있다. 

종민이는 세상 진지하게 개미가 죽은 애벌레를 데리고 가던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바위틈에 끼여있는 지렁이도 봤단다. 



다시 조심스럽게 "선생님 지렁이 쓰고 싶은데 못 쓰겠어요."라고 한다. 

나는 쓸 수 있다며 어깨를 두드린 후, 아버지 할 때 '지'를 쓰고, '러'를 쓰고, '이'를 쓰라고 한다. 

종민이가 종합장에 '지러이'라고 쓴다.  

마지막으로 함께 읽고, "좀 이상하지? 뭐가 들어가야 될 것 같아?"

"... 이응이요."

종민이는 힘주어 러밑에 ㅇ을 쓰며 앞니가 하나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지렁이" 크게 읽고 활짝 웃는다. 

저 쪽에서 버섯을 봤다는 아이들의 소리가 왁자지껄하자, 곧 몸을 돌려 그쪽으로 향한다. 

결 고운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뒤통수를 보니 확실히 많이 컸다. 



종민이는 한글을 모르고 입학했다. 

그리고 듣고 이해하는 속도도 느렸다. 

1학년 담임이 종민이를 위해 협력 교사를 신청했다. 

협력 교사는 4월부터 매일 2시간씩 정규 수업에서 종민이가 내용을 알아듣도록 도왔다. 

방과 후에는 한글 교실과 수학 교실에서 협력 교사를 만나 공부했다. 

내가 종민이를 만난 지난 9월에도 종민이는 한글을 잘 몰랐다. 

들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수업 시간에 활동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수업 중간중간 아이들이 활동을 시작하면, 종민이 곁으로 가서 모르는 글자를 알려주거나 

활동하는 방법을 다시 짚어주곤 했다. 



그랬던 종민이가 2학년이 되니 이제 음가와 낱자를 제법 연결한다. 

그럼 된 거다. 

한글은 음가와 낱자를 연결할 수 있으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수정한다.

아마 좀 지나면 언제 한글을 더듬거렸나 싶게 유창해질 거다. 

해솔이가 땅을 파고 애벌레를 잡았다면서 흥분한 아이들이 먼지처럼 몰려다닌다. 

종민이도 기웃거리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 패찰을 본 후, 종합장에 쓴다. 

뿌듯한 마음이 들어 한참 종민이의 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한글 익히기가 저렇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지난주 나는 '유초연계 이음교육' 컨설팅을 하러 유치원을 2곳 방문했다.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유치원 열매반 담임과 

초등학교 1학년 담임들이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하는 사업이다. 

내 역할은 사업이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도록 돕는 일이다. 

작년 2학기부터 이 사업에 참여했었다. 

지금까지 공립 단설, 사립, 공립 병설 등 다양한 유치원을 방문했지만, 

유치원 열매반 담임의 질문은 한결같았다. 

'한글 교육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반사적으로 나는 유치원 누리 교육과정을 기준 삼아하면 되는데? 싶었지만,

굳이 질문하는 담임들의 마음을 가늠하며 가만히 경청했다. 



'아이가 한글을 모르고 입학하는 것을 학부모님들이 너무 걱정해요....'

열매반 담임들에 의하면 아이가 한글을 모르고 입학하면 학교 생활에 뒤처질 것 같은 불안함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학원을 보내거나 집에서 방문학습을 시키고, 

유치원에서도 한글 교육을 시키도록 요청한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처음으로 의무교육에 발을 딛는 아이들이 잘했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아직 1학년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불안한 것은 드는 건 당연하다. 



잠시, 나는 내가 20여 년을 만나온 수많은 1학년들을 떠올렸다. 

해마다 좀 달랐지만, 한 학급에 20% 정도는 한글을 다 깨친 상태로, 60% 정도는 감만 잡은 체로, 

20% 정도는 한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입학했다. 

그랬던 그들이 3, 4학년이 되면 차이가 희미해졌다. 

5, 6학년이 되면, 그 차이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그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에 진학해서 이루는 성취와 한글 익힌 시기가 관계있을까?

글쎄,  이미 성인이 된 우리 집 아이들과 주변 아이들을 보면 별로 상관없을 것 같다. 



아이에게 특별히 인지적인 측면이나 감각기관 기능에 문제가 없으면 

2학년 1학기, 늦어도 2학년 2학기쯤엔 다 깨쳤다. 

그도 그럴 것이 1학년이 되면 한글에 대해서는 상황적 압력이 꽤 높은 편이다. 

학교에서는 매 시간 한글이 제시되고, 한글로 표현하기를 요청받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1학년 담임들과 교육청은 정말 많이 노력한다. 

담임들은 한글을 못 깨친 아이가 있으면 자기 자식인양 고민하고 

교육청은 한글과 관련된 각종 지원 사업을 진행하며 애를 쓴다. 

이때쯤이면 가정에서도 신경 써서 아이의 입장에서는 한글을 깨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년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는 해마다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뭇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바로 아이들 반응이었다. 

한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온 20%의 아이들 중에 유독 화를 참지 못하거나, 

심하게 움츠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예전 1학년 아이들 같으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천천히 제 할 일을 해 나가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젠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심하게 부끄러워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거나, 

아니면 물어보지 않고 책이나 공책을 찢거나 연필을 부러뜨리며 

자기가 내는 화를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한 반에 한 두 명씩 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한글 깨치기는 더 힘들고, 더 오래 걸린다. 

그 후 교과 학습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꺾였기 때문이다. 



나래원과 가람원 관찰 결과를 담은 종합장을 들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개선장군 같다. 

종민이 종합장을 흘낏 보니 동물과 식물 이름을 8개나 쓰고, 특징을 옆에 그려놓았다. 

특징을 글로 쓸 수 있으면 쓰고, 쓰기 어려우면 그림을 간단하게 그려도 좋다고 했더니 

아직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나 보다. 

그러나 식물의 모양이나 크기, 동물의 움직임 등은 꽤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잠시 쉬고, 관찰 결과를 가지고 자연 지도 그리기를 할 참이었다. 

종민이는 내게 종합장을 보여주며 아까 하던 이야기를 뒤이어 연신 종알거렸다. 

바위에 낀 지렁이를 꺼내 주려고 살짝 만졌더니 보들보들했으며 

불두화는 향기는 크게 나지 않았지만 하얗고 꽃송이들이 폭신폭신했다는 등등...



나는 종민이의 종알거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생각했다. 

빨리 한글을 깨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아이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도록 기다려줘야 한다고. 

그리고 아이가 그 마음을 더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게 어른의 역할이리고. 



언젠가 한글 때문에 고민하는 유치원 열매반 담임을 컨설팅하게 되면, 

혹시 한글을 모르는 아이를 보며 불안해하는 1학년 학부모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이야기해 줘야지. 


"한글을 깨치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이들은 다 해낼 수 있어요, 

그것보다 

'중꺽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를 꼭 간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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