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스몰토크의 굴레에 빠져버린 내향인의 모습에 대해 다뤄봤다면 오늘은 네트워킹의 늪에 잠식되어 가는 내향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스몰토크란 모름지기 불특정다수와, 즉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그래도 어찌 보면 조금은 마음 편하게 임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성을 가진 네트워킹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네트워킹이란 무엇인가? ChatGPT 선생님 왈, 네트워킹이란 나에게 기회, 서포트, 리소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직업/전문적 관계를 구축하고 키워나가는 것이란다. 즉 같은 분야 혹은 비슷한 분야에 있는 개인들 간에 정보를 공유하고 이를 통해 상호에게 유익한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발 의역 주의!)
Networking, in a social context, refers to the process of building and nurturing professional relationships that can provide support, opportunities, and resources. It involves connecting with individuals in your field or related areas, sharing information, and fostering mutually beneficial relationships.
챗GPT 선생님이 생각하는 네트워킹의 주요 요소는 다음과 같다.
관계 구축
정보의 교환
기회 창출
관계의 유지
커뮤니티 참여
순도 100% 내향인으로서 항목 하나하나마다 숨이 턱턱 막혀와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리스트를 쭉 보니 어쨌든 네트워킹을 시작하려면 관계를 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모양이다. 스몰토크도 잘 못해서 우물쭈물하는 내향인이 대체 무슨 재주로 관계를 무려 "구축"씩이나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와 관계를 구축하려면 일단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런 류의 만남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장소인 컨퍼런스, 밋업, 네트워킹 모임, alumni 모임 등등에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내향인들에게는 일단 이런 곳에 참가하는 것부터가 크나큰 관문인 것이다.
이직하기 전 회사에서 몇 번 컨퍼런스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정말 곤욕스러웠다. 특히나 내가 그 회사와 업계에 이미 너무 질려있었고 나에게 주어져서 해야만 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상태였는데 반 강제적으로 행사에 참여까지 하게 되니 정말 화가 났다. 최대한 디렉터의 눈에 안 띄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척하면서 사람을 피해 다녔다. 하, 진짜 먹고살기 힘드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나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같이 억지로 참여하게 되어 나와 함께 떠돌던 두 명의 회사 동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호주인들은 참 희한한 구석이 있다. 어떻게 저렇게 모르는 사람과 턱턱 이야기를 하고, 같이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링크드인에 추가하는 것일까? 이 일련의 행동들이 이후 관계의 "유지"로 이어지는지까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단은 시작을 한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그 컨퍼런스는 사람들 간의 네트워킹을 독려하기 위해서 특정 앱을 깔아 각자에게 QR코드를 부여하고 (이 QR코드를 스캔하면 참가자가 설정한 본인의 프로필이 자동으로 뜨게 된다) 가장 많은 사람의 QR 코드를 스캔한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호주인들이 얼마나 사람들 간의 네트워킹을 중시하고 권장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전 회사에 "IT인" 하면 생각나는 전형적인 너드 이미지를 죄다 때려 박아 놓은 것 같은 동료가 한 명 있었다.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을 하며 잘 지내는 이 동료는 햇빛을 언제 봤는지 모를 새하얀 피부, 눈이 뱅뱅 돌아갈 것 같은 안경, 어디에서 산 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애니메이션 굿즈 티셔츠, 물대신 들이켜는 에너지드링크나 소프트드링크, 죽어라고 맛있게 때려 넣는 패스트푸드, 뭐 이런 모든 모습들이 종합적으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IT 인의 그것에 다름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IT 너드의 소극적인 성격이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아주 외향적으로 네트워킹을 하는 축에 속했다. 그는 컨퍼런스나 행사가 있을 때 항상 능동적으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가끔은 회사를 대표해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행사 내의 각종 이벤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한 번은 무려 플레이스테이션 5를 상품으로 들고 오기도 했다.
중간관리자 정도 되는 직급에 있는 동료였는데 그를 보면서 IT인에 대한 편협한 나의 스테레오타입을 깨부쉈고 호주인들이 얼마나 네트워크에 힘을 싣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정말로 외향적인 사람이었든 아니면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든 간에 나에게 있어선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호주는 주변인들과의 네트워킹을 이용해 직업을 구하고 이직을 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사회이다.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라 모든 기반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노력해서 어떻게든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데 나 같은 이민자가 뭐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물론 문제는 내가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네트워킹 활동이 곧바로 취업이나 이직의 기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좀 더 멀리 보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나와 이전에 이야기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나를 떠올릴 기회를 늘려가는 것이니까. 호주에서 회사생활을 하며 네트워킹의 긍정적 사례를 숱하게 보고, 듣고, 경험에 왔음에도 나 같은 사람은 여전히 선뜻 그런 자리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타고난 기질이 그러한 것일까? 마치 타인의 social battery가 1000 amp 짜리라면 내 것은 고작 200 amp 밖에 안 되는 것처럼. 억지로 이런 곳에 참석하는 기회를 만들어봐야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티가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내가 아무리 가장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내향인의 어색함이 있을 거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오늘도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아, 이 행사 가? 말아? 물론 '말아'쪽이 우세한 경우가 99.9%이다.
어쩌면 이런 고민은 내 성향에 덧붙여 내가 이민자 1세대이기 때문에 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영어를 곧잘 한다고 평가받고 몇 마디 나누면 여기서 중고등학교라도 나온 건지 아닌지, 대체 이 아이의 악센트는 어디서 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평을 듣지만 여전히 내게 영어는 내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더해져 '완벽하지 않으면 차라리 입을 떼지 않겠다'라고 스스로를 검열한다. 그렇다고 모든 이민자들이 이렇지는 않다. 각국에서 온 다양한 악센트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 있고 자연스럽게 회사 일을 하고 네트워킹을 하는데. 머리로는 다 알지만 나는 아직도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네트워킹을 해야 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이런 내 고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고 오직 내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이 폭풍 같은 치열한 전투를 매일 치르며, 나는 오늘도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