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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토 Nov 20. 2024

참을 인 세 번이라야 호주에 살 수 있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살면 곧잘 불평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기가 차게 느린 행정처리이다. 대체 이 일이 이렇게나 오래 걸릴 일인가? 싶어 울화통이 터질 때쯤 무언가 진행되면 양반이고 보통은 울화통이 다섯 번쯤 터져야 일이 될까 말까 한다.


한국의 행정처리 속도는 정말 빠르다. 요즘 웬만한 일은 인터넷만 있으면 혼자 처리할 수 있지만, 간혹 사람을 통해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보통은 며칠 안에 해결이 가능하다. (물론 혼자 행정처리를 하기 위한 인증서 발급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한국 전화번호가 없는 해외 체류자라면 큰 산을 넘어야 한다.) 비단 행정처리뿐일까. 한 발짝 떨어져 살다 보니 한국은 모든 일의 사이클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고 느껴진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 댁의 인터넷이 현저히 느려진 것을 발견했었다. 혼자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길래 전화로 접수를 했더니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기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원격으로 트러블슈팅을 진행해 봤지만 해결되지 않아서 모뎀을 교체해 주기로 했는데 바로 다음날부터도 방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반면 얼마 전, 호주에서 산지 7개월쯤 된 새 냉장고가 고장 난 적이 있었다. 냉동실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금방 수리기사님이 와서 처리했을 법한 일이지만 호주에서 내가 겪었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제조사 대표번호로 전화 문의 접수 후 유선 상으로 1차 트러블 슈팅 (상담사와 약 30분간 통화하면서 온갖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냉장고가 너무 가득 찬 것은 아닌지, 온도가 너무 높이 설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냉장고와 벽 사이의 공간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지 등의 질문이었다.)

2. 제조사에서 외주 수리 업체로 케이스를 이관

3. 1~2일 후 외주 수리업체로부터 연락을 받아 냉장고 구매 영수증 이메일로 제출

4. 다음날 외주 수리업체에서 수리 기사 방문 예약을 위한 연락을 받음. 예약 날짜는 전화를 받은 시점으로부터 약 3~4일 후

5. 방문 예정 당일 아침 수리 기사가 sick leave (병가)를 써서 예약 취소 후 다시 2~3일 후로 예약 변경

6. 수리 기사 방문 후 수리 불가 판정

7. 다시 제조사로 케이스 이관

8. 2~3일 후 제조사로부터 새 냉장고로 교체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정확한 배송 날짜는 차후 통보된다고 함

9. 2일 후 제조사에서 연락을 받아 배송 일자를 조율

10. 이로부터 2~3일 후, 조율된 날짜에 새 냉장고 배송


탁구공도 럭비공도 아닌 내 냉장고 건은 약 3주에 가까운 시간을 이리 저리로 통통 튀어 다녔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겪었던 일과 비슷한 상황인데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당연히 너무 답답하고 화도 났지만 신기하게도 호주에 처음 왔을 때만큼 화가 솟구치지 않았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오히려 '이만하면 호주치고는 빠른데?' 하는 생각마저 드는 걸 보니 그 사이 적응을 해버린 것일까? 이런 일이 일상이다 보니 해탈했나 보다.


내 경우가 되면 이토록 답답한 일이기는 해도, 사실 이런 점이야 말로 호주의 장점이고 내가 호주로 이민을 온 까닭이기도 하다.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빠른 서비스와 편리함은 누군가의 노동을 갈아 넣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냉장고 수리기사님이 당당하게 sick leave를 낼 수 있는 만큼 나도 당당하게 sick leave를 낼 수 있다. 직원이 내 케이스를 열어보는 데 조급하지 않은 만큼, 나도 회사 일을 조급하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 모두가 일정 정도의 불편함을 나눠가지고 감수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극한으로 내몰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호주 사람들은 굉장히 느긋한 편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적은 것 같다. 심지어 휴대폰을 보지 않고 멍하니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인에게는 굉장히 기묘한 광경 아닌가? 한국은 이제 줄도 카카오가 서 주던데 말이다.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은 예삿일에 복잡한 출근길 고속도로에서도 차선 변경이 비교적 쉽다. 다들 잘 양보해 주고 비켜주기 때문이다. "After you."라는 말과 함께 좁은 통로나 문을 지나갈 때의 양보는 매일 한두 번씩은 겪는다. 이런 환경 속에 지내다 보니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서 지나가거나 혹은 양보할 만한 상황에서 양보하지 않고 차를 빠른 속도로 몰고 가는 사람을 보면 "급똥인가"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호주는 스몰 비즈니스들이 상당히 많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한국으로 치면 외주의 외주의 외주의 외주화가 되어있다고나 할까? 단, 좋은 쪽으로 말이다. 호주도 점차 대기업이 독식하는 분야가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작은 기업들이 나눠가지는 파이가 아직 꽤 되고 로컬 비즈니스들을 지역 사회에서 밀어주는 분위기도 상당히 강하다. 그러다 보니 최종 딜리버리까지 오만 회사의 오만 사람을 거치고 거쳐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중간에 껴있는 회사들과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다 먹고사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호주의 한 스몰 비즈니스가 인터넷과 인터넷 전화서비스 등을 구축해서 사용한다고 치면,

- 인터넷 망을 가진 회사

- 인터넷 망을 대여한 사업자
- 인터넷과 기타 비즈니스 맞춤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솔루션 회사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소비자인 스몰 비즈니스 업체에 인터넷이 설치되는 것이다.


조금 쓸데없을 정도로 세부화된 게 아닌가 싶긴 하고, 요즘에는 다이렉트로 대기업으로부터 서비스를 제공받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여전히 중간 업체들은 건재하다. 다만 문제가 생겼을 때 저 모든 단계를 거쳐 이슈가 뭔지 알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두 배 세배는 걸리지만.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참을 인을 가슴속에 새긴다. 오랜 기간을 거쳐 호주사람들이 다져놓은 나의 노동 시간과 삶의 질을 지켜주는 그들의 문화가, 모두 조금씩 양보해서 다 같이 먹고살 수는 있도록 만드는 사회가, 완벽하지는 않아도 살아봄직 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ATO (Australian Tax Office)에 문의한 건이 벌써 한 달도 넘게 지났는데... 이거 좀 어떻게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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