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의 소소한 문화가 있다면 매일 아침 같이 나가서 커피를 사 온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다행히도 회사 근처에 아침 8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커피 음료가 반값인 카페가 있어서 출근하는 날은 항상 같이 그 카페에서 커피를 사 온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를 사서 잡담을 하며 회사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가는 길목에 있는 편의점을 지나치고 있는 중이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들!"
고개를 돌려보니 편의점 옆에 자리를 깔고 앉은 노숙인 한 명이 보였다. 그는 우리를 슥 훑어보더니 "나 커피 한잔만 사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더 정확히는 우리 팀의 리더를 바라보면서 "ma'am"이라는 호칭을 써서 특정 지어 말했는데 누가 봐도 리더가 리더처럼 보였나 보다. 그녀의 반응은 내게는 의외였다. 아주 흔쾌히 "그럼요, 물론이죠!"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노숙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본인이 원하는 브랜드의 커피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우리 팀은 다 같이 바로 옆의 편의점으로 들어가 그가 원한 커피를 샀다. 5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방금 전에 우리가 산 반값 커피 한 잔 가격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그에게 커피를 건네니 그는 우리를 향해 웃어 보이며 고맙다고,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했다.
회사까지 다시 걸어오는 길, 팀리더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술을 달라는 것도 아니니까... 이럴 땐 할 수 있는 한 원하는 걸 주려고 해."라고 말했다. 돈을 주게 되면 주류나 담배, 최악의 경우 불법적인 약물에 사용될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실은 나의 팀리더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선 노숙인에게 빵이나 커피를 사주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 노숙인이 흡연 중인 사람에게 담배 한 개비를 얻어가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호주가 대단히 여유로운 나라여서 그럴까? 글쎄... 막상 살아보니 여기도 마냥 살기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일단 의식주 중에 '주'가 무척 비싸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은 전세 제도가 없고 보통 매주 혹은 2주마다 렌트비를 내게 되는데 이게 정신 번쩍 들게 비싸기 때문이다. 브리즈번의 임대료 중윗값이 한 주에 $649라고 하니까 한 달로 치면 대략 $2,600, 한국 돈으로는 한 달에 약 235만 원 정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20대 초중반의 직장 동료들을 보면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다수가 하우스메이트, 룸메이트와 같이 살고 있다. 세금도 높은 편이고 공산품의 가격 또한 비싸다. 지난달 요금을 분명 어제 낸 것 같은데 뒤돌아서면 또 내야 하는 각종 공과금도 비싼 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뭇사람들에 대한 인정이, 흔히 말하는 '인류애 충전 모먼트'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베이비 부머 세대에서 말이다. 호주도 나날이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어린 세대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이런 여유와 타인에 대한 긍휼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주머니 사정일까? 일단 호주의 1인당 GDP와 최저임금이 한국에 비해 높긴 하니까 말이다. 재미난 사실은 그런 것 치고는 호주에 노숙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많다. 2023년 기준, 호주에 122,494명의 노숙인이 있다고 하는데 (출처: Homelessness Australia Fact Sheet) 호주 전체 인구가 2천6백만 명 정도니 인구의 약 0.045% 정도이다.
한국은 2021년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쪽방 거주민을 포함하여 약 14,404명의 노숙인이 있다고 한다. (출처: 보건복지부 2021년도 노숙인 등의 실태 조사) 오천만 인구 중 단 14,404명인데 왜 그렇게 많이 본 것만 같을까? 이는 서울에만 전체의 약 29% 해당하는 노숙인이 있기 때문이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불가침 영역처럼 여기며 지나쳐 간 서울역의 풍경이, 한 노숙인에게 커피를 사주던 팀리더의 모습과 교차되어 떠올랐다.
뒤처진 사람, 낙오자, 정상 궤도에서 낙하한 사람. 이렇게 분류된 사람들과는 말조차 섞지 않는 차갑고도 은근한 혐오. 내가 여유가 없기에, 나도 지금 당장 더 빨리 발을 구르지 않으면 언제 뒤처질지 알 수 없기에, 그 불안감과 턱밑까지 좇아온 경쟁에 '나는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 해보는 타자화는 아니었나, 하고 이제사 스스로를 돌아본다.
과연 내 주머니에, 내 마음에, 저 사람을 위한 5달러가 있을까? 지금까지도 나는 모르겠다. 한국과 다르기 위해 숱한 시간과 돈을 써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이곳에서, 이민자 1세대라는 방패를 두르고 여전히 같은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