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로 이주한다고 말했을 때 종종 들었던 이야기 중에 하나가 호주는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냐는 걱정 섞인 물음이었다. 한때 백호주의로 악명을 날렸던 호주이니만큼 이런 걱정이 단순한 기우는 아닐지도 모른다. 이 질문은 언제 받아도 어찌 답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인종차별이란 결국 나에게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찌 보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것 같다가도 내게 일어나는 순간 발생확률 100% 되어버리는 일이라 나는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계에도 화두가 있다면 요즘 가장 핫한(?) 소재는 Microaggression, 한국어로는 어찌 번역해야 좋을지 아직은 확실치 않은 아주 교묘하고 간접적인 차별이다. 우선 이 글에서는 Microaggression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 조금 더 직접적인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여러 번 말해왔듯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내향인이다. 아웃도어 액티비티의 천국인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집콕을 고수하는 나라는 사람에게는 인종차별을 겪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서 어떤 상호작용이 있어야 차별을 받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심지어 이런 나에게도 강렬한 기억 하나쯤은 있다.
지금은 다른 동네에 살고 있지만 이전에 브리즈번 도심 근처의 아파트에 살았었던 적이 있다. 도심이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온갖 사람들이 섞이는 곳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대중교통도 편리하다 보니 소위 말하는 뜨내기들도 많아서 질 나쁜 사람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퇴근길이었다. 도심을 지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고,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밖은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퇴근은 자고로 스피드가 생명. 늘 그렇듯 앞만 보며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퇴근길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느닷없이 날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야, 이 중국 XX아! 너네 나라로 돌아가!!"
그렇다. 드디어 듣고야 말았다. 고백투유어컨츄리! 세상에, 실제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조금 신나고 설레기까지 했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일까? 어디 가서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늘었잖아? 같은 심정이 들면서 비죽이 미소까지 나왔던 것 같다. 나는 그냥 정말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고 심지어 그 사람과 거리도 그다지 가깝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이건 100% 인종차별이 맞다. 이야, 드디어 호주에 온 지 몇 년이나 지나 이런 순간이 오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내 옆을 어떤 자전거 탄 백인 남성이 지나갔다. 그러자 날 향해 소리를 지른 사람은 자전거 라이더를 향해 "야, 이 XX할 자전거 타는 놈아! 그냥 죽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걸 듣고 나니 나는 조금 애매해졌다. 이거... 그냥 개인 맞춤 욕이었어? 욕을 이렇게까지 정성스레 커스터마이징 해서 하는 거였어? 게다가 욕을 들은 상대는 백인 남자. 결국 그 사람은 아시아인인 나에게만 분노하는 게 아니었다. 모두까기 인형 같은 거였다니.
그 사람이 생각하기에 나의 약점이자 본인을 화나게 하는 부분은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인종차별이 맞긴 한데 어쩐지 김이 새버린 것이다.
이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이런 대놓고 하는 공격은 몇 년 전에 비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저렇게까지 대놓고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경우는 주로 정신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거나 술이나 약에 취해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물론 내가 지극히 내향인이고, 해가 지고 난 이후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도 맞다.
내가 이렇게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날을 보낸 반면, 호주에 부임하여 몇 년간 있다 간 지인 한 명은 퇴근길에 갑자기 누가 차에서 던진 깡통에 몸을 맞아 큰일이 날 뻔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던 중이라 자칫 잘못해 중심을 잃었으면 차도 쪽으로 넘어져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아직까지도 실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차별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먼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동네마다, 시간에 따라, 마주치는 사람에 따라 모두의 경험이 다르고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호주가 인종차별이 심하다 아니다를 한마디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나는 너무나 작은 한 명의 개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간간히 보도되는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사건 같은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이 벌이는 이런 류의 범죄가 정말로 호주 내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런 일은 대다수가 위험한 시간에 위험한 동네에서 벌어진다. 너무나 자극적이기에 호주 내외로 보도가 크게 될 뿐.
여기 살면서 느끼는 진정한 차별은 저런 저급한 차별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로 인한 차별이나 이 글 서두에 썼던 microaggression 같은 것이 더 큰 문제이고 더 일상생활에서 자주 겪는 일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차별'이 오직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차별만을 의미하는 거라면,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주는 인종차별이 심한 국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차별의 범위를 어디까지 넓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전개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그럼 나에게만 불친절한 직원, 친절하게 웃으면서 내뱉는 니하오 곤니치와, 나의 취향과 선호를 겉모습에 비춰 멋대로 정의하는 사람... 우리는 어디까지를 이야기해야 옳을까?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나가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