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워라밸이 좋은 국가 중 하나로 흔히 거론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실제로 Remote의 발표에 따르면 호주는 2024년 Top 10 워라밸 국가 중 8위를 차지했다.
1. New Zealand
2. Ireland
3. Belgium
4. Denmark
5. Canada
6. Germany
7. Finland
8. Australia
9. Norway
10. Spain
그러나 이는 지난해에 비해 꽤 떨어진 수치이기도 하다. 같은 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2023년에는 4위를 기록했던 호주가 8위로 4 계단이나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인 뉴질랜드가 꾸준히 상위권 중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것에 비하면 호주의 워라밸은 점차 나빠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민을 생각하면서 워라밸을 크게 고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땐 출퇴근길 통근버스 혹은 지옥철만으로도 기가 쪽 빨리게 힘들었고 여기에 퇴근까지 늦어지는 날이면 집에 돌아왔을 때 푹 절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일이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퇴근하기 눈치가 보이는 것도 한 몫했다. 물론 내가 그렇게까지 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특히나 다른 동기나 선배들에 비교해 보면 말이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의 나는 요즘 말하는 "MZ"직원이었던 것도 같다. 적당히 눈치 없이 적당히 퇴근하는 조금은 제멋대로인 그런 직원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선배들은 도대체 언제 퇴근하고 언제 여가 시간을 갖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늘 일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내가 과장이 되면, 내가 차장이 되면, 이 회사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나도 저래야 하는 것일까? 선배들의 휴가는 늘 넘치게 남아서 연말이 되면 강제로 매주 몇 개씩을 소진해야 했다. 아마도 어떤 지표가 있어서 인사팀을 통해 지시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 의미 없이 하루 이틀을 쉬고, 어차피 아무 계획이 없었기에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하던 일을 잡고 처리하던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먼 꿈처럼 느껴졌다.
그에 비하면 호주는 근로시간이 적고 풀타임 이외에도 파트타임이나 캐주얼 등과 같은 다양한 고용 형태가 있어서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휴가제도가 잘 보장되어 있다. 연차(annual leave)나 병가(sick leave) 혹은 회사에 따라 무급휴가(unpaid leave) 내지는 휴가 구매(leave purchase)등도 가능하기 때문에 아파도 연차를 아끼기 위해 꾸역꾸역 출근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콜록거리면서 출근하면 '나한테 옮기지 말고 집에 가서 쉬어.'라는 소리를 높은 확률로 듣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워라밸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호주에서의 나의 첫 번째 직장은 규모가 작은 곳이었고 많은 직원들이 회사의 설립과 동시에 채용되어 지금까지도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회사의 성장과 본인의 성장을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풀타임 계약 근로시간 자체가 호주의 다른 회사보다 많기도 했고 40시간의 오버타임은 계약상 포괄임금으로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업무의 특성상 24/7 서포트가 가능해야 해서 매주 On-call인 사람이 정해져 있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퇴근 이후나 주말에도 한두 시간 정도는 일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유지보수나 업그레이드가 있는 날은 통상적인 업무시간을 피해야 했기에 모두가 퇴근한 후에 시작해서 밤늦은 시간 끝나는 일도 잦았다. 게다가 호주는 각 주마다 공휴일이 다른 경우도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퀸즐랜드 주의 공휴일인 경우에도 다른 주가 공휴일이 아니라면 몇몇은 회사로 나와 근무를 하기도 했다. 이때 근무한 것은 다른 날 대체 휴일을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쌓인 애뉴얼리브(연차)와 오버타임 밸런스(추가근무수당)가 거의 회사에 위협이 될 정도로 많은 시니어도 있었다.
지금의 회사는 워라밸이 훨씬 더 좋은 곳이기는 하다. 그러나 회사의 규모가 크고 그 안에서 많은 직원들이 일하고 있기에 승진을 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커리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일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전 회사에 비해 유연하기는 한지라 언뜻 보면 퇴근하는 것처럼 보여도 퇴근하고 나서도 잠깐씩이라도 다시 접속해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저녁시간에 Teams에 접속하면 보이는 초록불들이 꽤 많다. 시니어로 갈수록 업무 성과에 대한 압박도 자연스레 높아지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근무가 유연하다는 것은 때로는 개인 시간에도 회사일을 들여다봐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두 회사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뽑자면 "가족 우선"이라는 것이다. 호주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가족중심적인 사회이다. 일이 많은 사람들도,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가족의 중요한 순간에는 꼭 함께하려는 노력이 눈에 보인다.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아이들의 방학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늘 고민하고 계획하고 주말도 가족과 함께 보내거나 가족과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가정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면 회사에 정말 중요한 일이 계획되어 있지 않은 이상 열일 제쳐두고 가족의 일을 해결하러 가는 편이다. 호주는 아이들이 일정나이가 될 때까지는 보호자가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야 한다. 소위 '픽업'과 '드롭오프'인데, 이것 또한 보통 부모 양쪽이 나눠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족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호주 직장생활은 '워라밸'보다는 '워크 앤 패밀리 밸런스'에 더 가깝다. 사적인 생활이 가족 아니냐라고 반문한다면 꼭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집순이 순도 100%에 남편과 노는 시간이 제일 재밌는 나에게는 이런 삶이 퍽 잘 맞는 편이다. 적어도 이제는 퇴근 후에 집에 와서 같이 오손도손 음식을 해 먹고, 같이 정리하고, 같이 재미있는 걸 보고 그에 관해서 수다도 떨고, 때로는 운동이나 산책도 갈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호주도 나날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워라밸 지수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내가 만난 워커홀릭들은 한국보다 더 기꺼이, 더 자발적으로 일을 쉬지 않고 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호주의 가족중심 문화는 바뀌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내가 우선시하는 가치와 같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이 남반구에서 평범하게 출퇴근을 반복한다.
호주의 회사와 이곳의 업무가 유니콘과 같지는 않다. 다만 당신이 가족 중심의 사회로 넘어올 마음이 있다면 호주는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