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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적인 체험 May 09. 2018

[한 술] 밥 먹을 정신

소화되지 않는 일상의 기억들

  밥 한 공기를 비우는 데 몇 번의 젓가락질이 필요한 지 세어본 적은 없다만. 오늘은 밥 공기에서 밥알을 덜 듯이 생각을 덜어 본다. 글이 끝날 즈음에는 생각도 조금은 덜어지겠지. 요즘따라 움직임을 멈춘 위를 엄지로 꾸욱 누르면서, 좀처럼 돌아올 생각이 없는 글 쓸 정신에게 호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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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떨 때는 감상에 젖는 일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마음은 종종 흐리며 그럴때면 웃으면서 사람을 대하면서도 어디선가 서글픈 것이 비집고 나온다.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들은 온전히 나에게로만 기울고, 지금은 내 것이 아닌 행복했던 순간들은 이미 진작에 소화가 된 듯 그것을 베어 문 기억만 있다. 헛헛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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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무언가 먹으면서 끝끝내 살아남으면서도, 채워질 수 없는 것들이 별 생각 없이 살아온 날들과 함께 늘어난다. 밥 먹을 정신도 없이 바쁘거나, 슬프거나, 드물게 기쁘거나 하는 순간이 몇 번 지나가고 나면 나는 어느새 또 다른 계절을 맞고 있다. 이렇게 자신조차도 잊고 한차례 휩쓸리면, 나는 자랄 기회도 잃고 겨우 제 자리에 견디고만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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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소화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가령 그가 떠나면서 했던 말이나 마지막 저녁 식사 같은 것을. 내 몇 년 간의 꿈을 단번에 이룬 그녀에게 건넨 축하 인사와 그날 꾸역꾸역 삼켜낸 물에 말은 밥이 유난히 축축했던 것을. 모멸감이란 단어로 손쉽게 압축되어버리는 케케묵은, 그러나 여전히 뾰족한 장면들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아 그곳에서 한참 도망쳐온 나를 손쉽게 비참하게 만들 때.

  내가 상처입힌 것들은 나를 상처입힌 것보다 대개 상황이 더 지독하다. 후회라는 것은 항상 상황이 벌어진 후에 할 수 있는 거라서 후회할 자격이라는 것은 언제나 누추하고 초라한 데가 있다. 내가 뱉어버린 것들을 몇번이고 되새김질 해봐도 마음 한켠 꽉 막힌 것은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으 그저 답답하고. 애초에 내 그릇이라는 게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한없이 작아지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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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는 쉽게 소화되지 않았다가, 배설 또는 생장, 그 어느쪽이든 거쳐서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된 것들을 생각한다. 막막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나도 모르는 사이 새어 나오면 나는 나의 그릇이라는 게 생각보다 크구나 하고 근거가 필요없는 낙천적인 마음을 갖고. 앞으로 내가 더 멋있게 변할 것만 같은 믿음이 생기고.

  내가 사랑하는 많은 성장담처럼 나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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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지체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인 일상도 언젠가는 소화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나의 일부가 될 때까지 나의 일부가 되었으면 하는 것들을 실패하는 것만큼 또 시도하고. 밥도 열심히 먹는다. 매 끼니가 맛있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 하루도 잘먹었습니다.

내일 하루도 잘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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