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됐다. 이 정도면 곡을 완성한 것 같으니 이제 다른 곡을 해보자고 악보를 덮는 건 항상 망설여진다.그런데 어려웠던 곡은 말할 것도 없고 쉬운 곡마저도 망설임없이 시원하게 넘어간 적이 없다. 그래서 일전에는 속도, 미스터치, 정확성 등으로 나만의 점수표를 만들어 바둥거리며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기준으로 삼기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주관적이다 보니 이것도 망설이긴 마찬가지였다. 곡이 지루하면 좋은 점수를 주고 후다닥 끝내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면서 이제는 유혹과 싸우느라 머리만 더 심란해지기만 한다. 이래 저래 깔끔한 건 없으니 그래서 딱 정해봅니다. 100! 이제부터 한 곡을 연습할 때 100이라는 숫자를 카운팅 하기로 합니다. 결정장애는 연습할 시간을 좀먹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딱 끊어가려는데? 프라이스 법칙이 있다. 관련 업계 종사자 수의 제곱 근에 해당하는 인원이 전체 생산성의 50퍼센트를 만들어 낸다는 법칙, 예를 들면 전체 종사자 수가 100명인 회사에서 제곱근(10명)이 전체 생산성의 50퍼센트를 담당한다는 의미가 있다. 파레토 법칙도 있다.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인원의 20%에서 발생한다는 법칙이다. 그 숫자에 대한 정확도에 따지고 들 사람은 없겠지만 특정 소수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메시지는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음악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고전 음악의 수많은 음악가 중에서 극히 손꼽는 일부 작곡가 예를 들면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이 클래식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대중성 있는 곡의 주인이다. 전체 음악가의 불과 몇 %, 아니 1% 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또 아버지 바흐를 예를 들면 그가 작곡한 1,000여 곡이 넘는 작품에서 널리 알려지고 클래식 애호가들이 즐겨 듣는 곡은 또 몇 % 정도나 될까? 이런 생각의 끝은 결국 내가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곡은 전체 음악에서 얼마나 미미할 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한 곡을 완벽하게 하느냐 혹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널리 다양한 곡을 시도해 보느냐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후자를 선택하였다면 '이쯤 하면 됐다'는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 보는 것은 어떨까? 정신건강에 좋은 약이니까. 체르니 30, 40, 하논 다 섭렵하고 소나티네 소곡집 이렇게 간다면 쇼팽 녹턴은 도대체 언제 볼 수 있긴 하겠는가? 그전에 말라죽을 수도 있겠다 싶으면 후자를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100을 카운팅 해 봅니다~!
1st
초견을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기저기서 절뚝거리고 허우적거리지만 일단 끝까지 가봅니다. 시간도 체크해 봅니다. 이때만큼 두근거리고 가슴 설레는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5th
내가 왜 이 곡을 하려고 했는지, 느낌 팍 왔던 그 선율을 가슴에 새겨보고 멋진 연주를 상상하면서 부푼 꿈을 가져봅니다. 5번 정도만 해도 조금 까다로운 부분, 꽤나 연습해야겠구나 할 패시지들이 가려지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절뚝거리며 완주해 보고 시간도 체크하면서 이제부터는 안 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반복 연습하여 전체적으로는 어느 정도 매끄럽게 흘러갈 수 있을 만큼 연습합니다.
10th
여전히 매끄럽지 않은 부분, 어려운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해 나갑니다. 이쯤 돼서도 전체 완주 시간이 인 템포의 1/2 ~ 1/5 속도에서 완주하지 못하면 아직 제대로 연주할 역량이 부족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이긴 하지만 잘못 선정한 곡이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꼭 연주해 보고 싶은 곡이라면 1/5 까지도 봐준다는 건데 가급적 말리고 싶군요.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서 더 많은 좋은 곡들을 놓칠 수가 있거든요.
20th
어려운 구간이 어느 정도 손에 익었습니다. 곡의 구조도 머릿속에 정리되기 시작했고 부분적으로 암보가 되어 악보를 보는 시간이 조금 줄었습니다. 암보가 필수는 아니니 암보에 연연하지 않지만 그래도 암보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악보를 보는 시간과 반응 속도를 높일 수 있고 그만큼의 시간을 감정 표현에 집중할 수 있기에 그렇죠. 궁극적으로 암보를 하고 싶지만 부족한 기억력이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습니다. 이 것조차도 반복을 통해 자동연주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고연습을 끌고 갑니다.
20번 전후로 손가락 번호도 세팅을 끝내야 합니다. 속도도 인 템포의 90% 정도까지 온 시점인데 사실 인 템포의 정확한 정의는 없습니다. 전문 연주자들의 녹음도 서로 20%까지도 차이가 나는 경우는 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 템포(100%)는 내가 마음에 드는 연주자를 모델 삼아 그 시간을 정한 것입니다. 누가 맞네 틀리네 할 것도 없습니다. 굴드의 연주나, 리시차의 연주 스타일과 템포를 해석하는 게 다르지만 모두 칭송받는 피아니스트들이지요. 틀린 건 없고 서로 다를 뿐이니까. 습관이 무섭기에 잘못된 핑거링이나 잘못 본 음표가 있는데도 자칫 모른 채 계속 연습하게 되면 점점 더 고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꾸밈음 하나 음표 하나 잘 못 읽은 채로 자동 연주를 하다가 고치는 노력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뼈저린지 알게 됩니다. 고쳤다고 생각했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 아... 꼭 이럴 땐 잘못된 기억이 더 오래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분 탓이라고 하나요. 어렵지 않은데도 매번 같은 장소에서 잘못된 동작을 반복하면 그 부분에서만큼은 천천히 매끄럽게 넘어가도록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연습해야 하지요. 그렇게 했음에도 속도를 조금 높이려 하면 여지없이 되살아나려고 하니 의도치 않게 까다로운 부분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50th
여전히 작은 미스터치를 남발합니다. 셈여림 표현 등 음악 기호에도 좀 더 정성을 들여 표현하려 노력도 필요한 시점입니다. 처음에는 정확한 위치 누르기도 버거운데 이 부분을 연습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간과하고 무시한 채로 여기까지 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조차도 습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70th
70번까지 왔네요. 그리고 이제 좀 들어줄 만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연습에서 연주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여전히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겠지만 완벽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 '완벽'의 정의도 개인이 정하기 나름이겠지만 최소한 엄격해야 한다는 점을 조언하고 싶네요. 많은 일이 그렇듯 50%에서 90%로 끌어올리는데 들어가는 힘보다 90%에서 95%로 끌어올리는데 들어가는 힘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95%에서 98%는 이보다 더 할 것이고요. 어디까지가 이 곡에 대한 나의 목표인지를 가늠하기 시작하게 되고 욕심을 부릴지 타협을 할지. 버려야 할 것과 해내야 할 것을 가려야 할 시간이긴 한데 60번 70번을 해도 잘 안 되는 부분은 앞으로도 갑자기 해결될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즉, 완전무결한 연주를 하겠다는 목표보다 어떻게 하면 이 곡을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피아니스트로 빙의되어보기도 하죠.
그런데,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쉬운 곡이었다면 이미 연주를 즐기기 시작하였는데 굳이 100번을 채울 필요가 있을까도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처음 악보를 펼쳤을 때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조금 집중력은 떨어지고 지루해지기 시작하면 언제부턴가 의무감으로 100을 채우겠다는 산수적인 목표를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더욱더 방향을 잃기 시작할 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를 다독여 봅니다. 좋은 책을 다시 읽게 되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글귀, 생각하지 못했던 소소한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같은 곡을 연주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연습 처음을 시작했을 때와 같은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귀 기울여 들어가며 연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그 이유는 내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스스로에게 격려를 보내보기도 합니다. 세상 일에 인내심이 필요할 때 나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고 심란해지는지, 그리고 다시 그 목표를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만히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봅니다.
90th
나는 연주한다. 실수가 있으면 어떠랴. 연주는 즐겁다.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하늘을 날고 있다.
100th
드디어 100번이다! 마지막이다. 때로는 지겨움을 극복한 인내심으로, 때로는 충만한 기분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다. 심지어 아쉬움이 일어나 공짜로 한 번 더 연주해 보기도 한다. 여전히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한들 그건 내 실력이 조금 부족한 것이지 그걸 계속 붙잡고 있다 보면 얻는 것보다 다른 기회를 더 놓칠 것 같다. 좀 더 연습하면 더 깔끔한 연주를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더 많은 곡을 접할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중요한 얘기다. 왜냐하면 그걸 정하는 게 여기 100번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임을 상기해 봐야 한다. 훗날 실력이 늘어 다시 돌아왔을 때 여전히 서툴고 날 괴롭히던 패시지들이 의외로 쉽고 자연스럽게 연주될 수 있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게 결코 음악 공부나 역량 향상 어느 측면에도 효율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대로 처음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라. 한 마디 한 마디 악보를 뚫어지게 보던 기억을 상기하면 지금 얼마나 발전했는가? 이는 다음 곡의 밑거름이 되는 건 틀림없다.
쉬운 곡을 선택하게 되면 100번이 지겨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려운 곡을 하게 되면 100번이 모자라거나 아쉬울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중간에 멈추거나 더 나아가지도 않는 100번. 조금만 더 해볼까 하며 뒤를 돌아보기도 하겠지만 이 곡은 이제 나의 연습곡에서 연주곡 리스트로 넘어갔으니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껏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저는 100입니다. 누군가는 150, 300 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쯤 하면 됐다는 걸 알고 싶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래서 어디쯤 왔는지를 알고 싶다면 자신만의 숫자를 기준으로 가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쯤에서 멈춰야 할까? 아니면 계속해야 할까? 이 고민 때문에 100이라는 숫자를 만들어 내었지만 개운하지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둘로 나눠진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에 서 있는 건데 살아가다 보면 이런 상황은 너무 흔한 일입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단지 선택의 문제라고 끝내버릴 수도 있다면 질문을 달리 해 볼 수 있다. 고민을 더 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 그만 여기서 결정을 해야 할지. 결정이 어려운 게 아니라 고민을 그만둘지가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고민이 고민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에게 많은 성찰의 기회를 주고 더 나아가야 할 이유 혹은 멈춰야 할 나만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결국 궁극적인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