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글
어느덧 내가 Z와 헤어진지는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4월이 되었다. 나는 Z와 여러 해 전에 떠났던 경주여행을 떠올렸다.
우리는 겨울에 경주여행을 떠났었다. 경주 초입에 들어설 때쯤, 길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쪽 지방에서 이렇게 많은 눈이라니. 라디오에서는 연신 몇십 년 만의 대 폭설이 경상도 지방을 뒤덮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와 Z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우리 이번 여행 망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경주에 진입하던 참이었다.
그때, 도로에서 우리 차가 미끄러졌다.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내 눈앞으로 가로수가 보였다. 느리게 달리고 있었지만 미끄러진 차는 그대로 가로수에 처박혔다. 둘 다 다친 곳 없이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남은 3일을 그대로 사고 처리에 쏟아야 했다. 여행이 진짜로 망해버린 것이다.
나도 나지만 Z는 그때 사고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3일 후 돌아오는 기차에서 둘 다 말할 수 없는 피로를 느꼈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다음 경주 여행을 기약했다. 우리 다음에 꼭 다시 경주에 오자. 그때는 이번에 못한 것들 다 하자.
그러나 우리는 다시 경주에 가지 못하고 헤어졌다.
얼마 전, 바람에 달려 무더기로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나는 눈에 덮인 그때의 경주를 떠올렸다. 떨어지는 벚꽃들이 겨울에 내리는 눈보다 더 눈 같았다. 마침 일이 한가해지는 시즌이었고, 나는 혼자 경주를 여행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랜 Z와 다시 떠나기로 했던 여행이었지만.
사실 지난 2년간 다시 경주에 갈 기회가 몇 번 있었고 나는 한 번도 경주에 가지 않았다. 다른 좋은 여행에 대한 기억도 많은데 왜 나는 유독 그때의 그 실패한 여행이 마음에 걸려 경주에 가지 못했던 걸까?
아무튼 나는 거의 즉흥에 가깝게 바로 경주에 출발했다. 경주로 떠나는 길, 경주에 도착해서 걷는 길, 서울보다 따뜻해서 벌써 지기 시작한 벚꽃 길, 동글동글한 왕릉 앞 공원... 경주의 모든 길에서 나는 Z를 떠올렸다. 나는 이 길 중 어느 길을 Z와 걸었을까 떠올려보려고 애썼지만 하나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모두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Z의 경주여행은 망한 여행이었으니까. 경주는 처음 가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몇 달간, 나는 종종 Z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다. 술에 취하면 Z에게 안부를 묻지 않기 위해 간신히 정신을 차려야 했다. Z와 다시 만나고 싶은 거냐고? 아니. 나는 이제야 Z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생겼던 것뿐이다. 지난 2년 동안은 Z에게 전화를 걸면 안 될 것만 같았다. Z의 목소리를 들으면 모든 게 다시 살아날 것 같았다. 내가 참아온 것이 모두 허사가 될 것 같았다. Z와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걸지 못한 전화였다.
게다가 나는 나보다도 Z가 더 걱정됐다. 나는 종종 친구들 앞에서 울거나 술을 마시거나 욕을 했다. 나는 Z가 그런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Z는 아마 혼자서 그 시간을 보냈을 것이었다. Z가 혼자 보내는 시간 동안 Z를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2년간, 나는 조용히 Z의 마음이 정리되길 기다리면서 내 마음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주에서 나는 돌이켜보았다.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 Z를 떠올리면서도 Z와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듯, 아마 Z도 그렇지 않을까. 나는 이제 Z가 걱정되기보다는 Z가 얼마나 잘 지내는지, (분명 지금쯤은 잘 지낼 거라는 확신과 함께) 나와 헤어질 때쯤 입사했던 회사는 잘 다니는지, Z의 형은 이듬해에 진짜 결혼을 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여행에서 하루 온종일 Z를 생각하며 경주 시내를 돌아다녔고, 그날 밤 숙소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2년 전에 삭제했지만 한 번도 잊어버리지 못한 번호로.
내가 지난 2년간 만나왔던 남자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선명해졌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 눈치챘을 것이다. 틴더에서의 만남들이 Z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뻔한 결말. 나는 Z를 잊기 위해 틴더를 시작했고, 그 만남들이 결국 Z를 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한 순간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내가 영원히 Z를 잊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을 그에게 내어줄 거라는 사실.
휴대폰 너머로 신호음이 들렸다.
나는 세차게 뛰던 심장이 점점 진정되는 걸 느꼈다.
이상하게도, Z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나의 오랜 친구에게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