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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태리 Apr 04. 2021

남자 C 두번째

연애 수행


새삼스럽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나는 이 연애의 시작이 새삼스러웠다.

연애를 끝낸 지는 고작 7개월이었지만, 연애를 시작한 지는 무려 6년이 지나 있었다.

나는 C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Z와의 연애 대서사시에(5년이면 대서사시 맞다) 기승전결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C와 하는 대화 중에 ‘나 6년 전엔 어땠더라?’ 라며 아스라이 사라지려는 낡은 기억을 꺼내야만 했다. 나는 연애 기승전결에서 ‘기’부분을 이제 막 시작하는 참이었다. 연애 초반이라면 으레 해야 하는 것들을 해내기 위해 애써야 했다.


매주 데이트를 어디로 갈지 부지런히 알아봤으며 외박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도 조심스레 살펴야 했다. 잠은 호텔에서 모텔에서? 아니면 여행을 가야 할까? 데이트에 돈을 얼마나 쓰는 편이지? 선물엔 얼마를 써야 하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대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종종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시간들이 있었다. 일정한 패턴이랄 게 생기기 전인 이 초반의 연애는 생각보다 귀찮은 게 많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Z와의 연애에서 느꼈던 지겨움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편리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Z와의 연애에는 규칙 같은 게 형성되어 있었다. 매주 토요일은 서로를 위해 비워놓았기 때문에, 특별히 토요일에 다른 일정이 생긴다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했고, 데이트가 편한 몇 장소들이 있었으므로 오랜 고민 대신 선택지들 중 하나를 골라 데이트를 했다. 나는 이런 패턴화 된 데이트들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에서 오는 간편함을 알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걸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안전하고 규칙적인걸 좋아하는 Z의 습성에 맞춰 데이트도 패턴화 되어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연애 초반, 몇 번쯤은 Z에게 평일에 갑자기 만나자고 하거나, 오늘은 바다를 보러 가자는 둥의 조금 예상 밖의(그러나 가끔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데이트를 요구해보았었고 그때마다 Z는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Z는 고지식하고 원칙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많은 준비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데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와의 이별을 준비할 때 나는 어떤 점 때문에 Z와 헤어져야 하는지를 세세히 고민해보았고, Z의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습성도 고려 대상이었다. 일상에서 찾아오는 돌발성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요소였지만, Z에게 그런 사건들은 고난이 되었다. 이런 다른 성격에 대해 처음엔 내가 맞고 Z가 틀리다고 단정 지었지만, 새로운 걸 싫어하는 건 Z의 단점이 아니라 특징일 뿐이었음을 지금은 안다.


그러므로 C와의 연애에서도 나는 Z와의 기억을 발판 삼아 여러 가지 실험을 해봐야 했다. 나는 그때마다 C의 반응을 통해 넘어도 되는 선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하나씩 체크해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을 때 C의 반응, 아니면 갑자기 선물을 건넸을 때 C의 반응. 아니면 ‘친구 만났으니 이따 연락할게’라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C의 반응. 그런 것들을 통해 나는 C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를 하나씩 표시해둘 수 있었다. 그렇게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채워가며 나는 점점 C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C의 행동들에서 패턴이나 이유를 잘 읽지 못하는, 즉 C에 관한 한은 초보자였고, C가 예상치 못한 행동들로 나를 당황하게 하는 순간들을 맞닥뜨렸다. 그럴 때 나는 이 오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려웠고, C와의 오류는 결국 신뢰를 깨뜨리는 문제들이 되었다. C는 종종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가서 연락이 끊겼고, 늦은 시간 전화는 받지 않지만 메시지는 답장하기도 했고, 취하면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횡설수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이전의 연애에선 찾기 힘들었던 C만의 특징에 적잖이 당황했다.

난 C의 모습이 내 이전의 연애에 빗대어서 틀렸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그저 C가 가진 특징에 불과한 건지 판단할 수 없었고, 거기서 오는 내 불안함은 그를 믿지 못할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C가 술을 늦게까지 마시고 아침에 연락을 한 그날, 나는 C에게 이별을 고했다. Z사전에는 늦은 술자리가 없었다. Z의 기준으로 연애를 시작해버린 나에게 C의 늦은 술자리는 오류사항이었다. 극단적으로, C의 일상이 나에게는 오류사항이었다.

그렇게 C와의 연애도 여름이 끝나면서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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