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4. 비타민, 솜, 색종이

부제 : 비타민 인간, 결핍형 인간

by 김주렁

"비타민 결핍 증상들 시험에 나올 거니까 외울 수 있도록. 자, 비타민A 결핍은 야맹증, C는 입에서 피가 나는 괴혈병, D는 허리가 굽어지는 구루병, E는 불임, B는 각기병이라고 다리가 붓는 증상이다. 이걸 사람처럼 그려보면... 자 외우기 쉽겠지? 다 선생님이 너희들 외우기 쉽게 알려주는 거니까 시험에 나오면 꼭 맞출 수 있도록."

생물 선생님은 본인만 아는 비밀 레시피를 알려주는 것처럼 청록색 칠판에 비타민 인간을 그리고 있었다.

'온갖 안 좋은 증상이란 증상은 다 모아놓은 사람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중학생이었던 나는 생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감수성만큼은 풍부했던 지라, 흰색 뼈대뿐인 그 비타민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감수성이라는 겉포장지로 둘렀다 뿐이지, 그 무렵의 나는 사회성과 거리가 먼 아이였다. 14살이 무슨 고행을 겪었다고 세상만사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가득 차 있으면서, 그 감정을 밖으로 옮길 만큼 능동적이고 진취적이지는 못했다. 불만은 많지만 선생님이 시키는 건 또 다 하고 학원도 빠짐없이 잘 다녔다. 겉보기에는 그냥 조용한 애 1 정도의 포지션이었겠지 싶다.


언젠가 수학 시간엔 색종이가 준비물이었다. 중학교에서 무슨 색종이냐고 툴툴대면서도 내심 뭘 만들까 기대하던 얄팍한 반항심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자, 오늘은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해 배운다. 색종이 챙겨 오라고 했지? 없으면 옆자리 애한테 몇 장 달라고 해라. 많이 안 필요하니까."

수학 선생님은 칠판에 능숙하게 직각삼각형을 그리고, 각 변을 한 변으로 한 정사각형을 세 개 그리셨다.

"자, a제곱 더하기 b제곱은 c제곱이라고 했지? 오늘은 이걸 직접 만들어본다. 백날 설명해봐야 한 번 보는 게 빨라. 너희 반은 진도도 빠르니까 이러면 대충 다른 반이랑도 맞겠다. 아무튼 마음대로 만들어봐."

다홍색, 노란색, 하늘색... 다채로운 색깔의 색종이들은 공장에서 봉투에 포장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나는 개구리가 돼서 애들이랑 같이 놀 거야."

"난 바람개비가 돼서 초원에서 달려 다닐 거야!"

"난 학이 돼서 누군가의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걸."

정말로 별종의 별종 색종이라고 해도, 중학교 수업시간에 피타고라스 같은걸 설명하는데 쓰이는 종이 쪼가리가 되는 상상을 한 색종이가 있을까? 난 없을 거라고 본다. 이건 색종이에 대한 모독이요, 색종이 인권(종이권이라고 해야 하나) 침해다. 반 친구들과 선생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싶게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나는 삼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나라도 좋아하는 것 하나쯤은 있었다. 물론 밖에서 말하고 다니거나 친구들에게 자랑도 안 하지만 말이다. 내 방 책상 서랍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반짇고리와 실타래들이다. 나름 손재주가 있던 터라, 어머니도 재봉 일을 하시던 터라, 어려서부터 손바느질로 뭘 만드는 걸 좋아했다. 처음엔 어머니가 도안을 그려서 원단을 잘라주시면 그걸 바느질만 하는 체험판 수준의 일만 했지만, 점차 스스로 도안을 그리고, 원단을 자르고, 안에 솜을 넣어 작은 쿠션이나 인형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남자 중학생의 기본 소양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축구였다. 축구는 여러 운동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았고, 방과 후 운동장은 늘 아이들로 붐볐다.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놀며 공으로 잔디밭을 수놓는 동안 나는 내 방에서 인형에 수를 놓았다.


그땐 나만의 취미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뿌듯해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머니 혼자서 집에서 나를 기르시며 재봉 일을 하셨으니 내가 그런 취미를 갖게 된 건 취사선택보다는 적자생존의 진화에 가까웠을 것이다. 감수성 있는 척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것도, 잘 사는 유복한 아이들과 비교당하기 싫었던 중학생 머리에서 나온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방어기제였으리라.


칠판 위의 비타민 인간을 동정하던 당시의 나는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동족 혐오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쳐다볼까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눈, 말을 하도 안 해서 말라버린 입술, 항상 책을 보거나 엎드려 자서 굽어버린 목, 잘 못 챙겨 먹어서 까진 피부,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밖에 안 해서 뼈밖에 없는 다리. 이런 증상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그때의 나였다. 운동이며, 건강이며, 관심이며, 친구며. 나는 결핍형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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