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3. 코트, 쓰레기통, 댐

부제 : 흐릿함에서 오는 아름다움, 추억

by 김주렁

코트를 입기엔 추운, 패딩을 입기엔 더운 그 사이 어드메의 계절이었다. 추운 것보다는 땀나서 찝찝한 것이 더 싫었기에 행거에 걸려있던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자마자 차갑고 날 선 바람이 옷소매를 타고 들어와 몸을 휘감는 것을 보니, 오늘의 첫 번째 선택은 실패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한 풀 꺾인 마음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굳이 집으로 다시 돌아가 패딩으로 갈아입을 만큼의 성실함은 없었지만, 설령 내가 그만큼 성실했더라도 오늘만큼은 뒤로 돌아가거나 물러서는 행위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직진이다.


서울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게 낯선 내 모습이 낯설었다. 서울이라곤 수학여행 때도 가본적 없던 시골쥐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서울쥐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상경하여 서울로 첫 진출한 이후, 어찌어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한 이후로는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과정은 생각보다 리드미컬했다. 토목공학 과제로 교각, 건물, 댐 등 실제 장소를 찾아가 보고 나름의 역학적인 사고를 더해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교수님의 과제는 공대스럽지는 않았다. 교각, 댐, 물, 나무 등 이런저런 것들을 고민하던 나를 대뜸 흔든 것은 머릿속 깊은 곳에서 울리던 풀피리 소리였다. 한 번씩 제 리듬을 잃고 푸슉 소리를 내던 보릿잎 피리, 그 피리를 입에 물고 빵빵한 볼로 피리를 불던 너...


주제 선정부터 계획 발표 및 구상까지 착착 빠른 템포로 진행되었지만, 막상 영천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고 나니 박자를 세던 드럼스틱이 부러졌다. 틱, 하며 멈춰버린 박자는 나의 불규칙한 심장박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댐을 생각해본다. 댐의 위치, 구조, 높이에 따른 하중, 피로 누적에 의한 파괴, 시멘트의 수화 작용... 그렇게 그려진 머릿속 조감도와 블루프린트엔 왠지 수채화 풍으로 그려진 두 사람이 서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댐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댐이 계속 눈에 밟혔던 것은 댐 어귀에서 너와 함께 나눴던 대화 때문이리라.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 그때,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도 컸으나 나를 더 짓누르는 것은 너와 맞잡은 왼손이었다. 으레 하는 중학교 때쯤 첫사랑이었다. 그때는 천년만년 같이 살 거라고 망상 아닌 망상을 하며, 하교하고 걷는 동네 산책길이 너무 달았다.


"에? 서울로요? 갑자기 이사는 왜요?"

난데없이 스포일러 당한 영화 같았다. 갑자기 원하지도 않던 결말의 인생 스포일러를 당한 중3의 나는 유약했다. 아버지 직장 부서가 옮겨져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설명은 귓바퀴 정도만 맴돌다가 흘러나갔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아버지 옷자락을 흔들었으나, 어른의 사정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더욱더 화가 났던 대상은 한 편으로 서울을 동경하고 있던 나였다. 그 애와 헤어지는 것은 싫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울이라는 별천지를 동경하던 내 마음은 나조차도 알기가 어려웠다. 분리수거가 덜 된 쓰레기통 같았다. 슬픔과 아쉬움, 기대감과 궁금함 등 여러 감정들이 분리배출되지 못하고 커다란 통 안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댐은 한적하고 또 한결같았다. 나는 이렇게나 변했지만, 댐은 가족앨범 속 스냅사진처럼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아쉽게도 그 사진에는 너도 없었다.


이렇게 궁상 아닌 궁상을 떨었지만, 사실은 너의 얼굴도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추억을 추억하고 있다. 굳이 그 동네까지 가서도 고향 동네에 가지 않은 것은 그 흐릿한 추억의 초점을 맞추고 싶지 않아서였기도 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추억도 적당히 흐릿할 때 더 아련하고 애틋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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