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5. 조미료, 고수, 파티

부제 : 슴슴한 인생에 조미료가 뿌려지고

by 김주렁

조미료 없는 음식은 슴슴하다. 건강한 맛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육체 건강의 입장이지 정신건강의 입장에선 이만한 고역이 없다. 내 인생도 지금까진 너무 건강한 맛이었다. '이제는 인생의 조미료가 필요할 때다.'라고 이따금 생각하지만, 생각만 한다고 조미료가 뿌려지지는 않더란 말이다. 20년 정도의 내 인생은 간을 하나도 안 한 설렁탕 같았었다. 설렁탕 하니까 건강해 보여서 좋긴 하지만, 굉장히 맛없는 고기 우린 희멀건 물 같다는 말이다. 인기가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의도치도 않았고 그렇게 소망하지도 않는 건강한 인생에 갑작스레 조미료가 뿌려진 것은 대학교 2학년 1학기 개강파티에서였다. 말이 개강파티지 사실 선후배들과 죽자살자 술 먹는 자리라서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날은 그때까지 살아온 21년 중에 가장 감칠맛 나는, 미원이 팍팍 뿌려진 날이었다.

좁디좁은 전공이지만 그 안에서도 각 무리 간 밴 다이어그램이 그려지고 구획이 나뉜다. 먹고 죽자는 공격적인 파티,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관심이 지대한 탐구형 파티,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술은 별로 안 좋아하는 평화로운 중립지역 파티, 그리고 이 모든 곳을 돌아다니는 역마살이 낀 듯한 몇몇의 무리들. 내가 속한 파티는 조용히 술을 마시고 본전을 찾자는 가성비 추구형 모임이었다.

"이 집은 계란말이랑 짬뽕탕이 참 맛있더라고. 거기에 감자튀김까지 시키면 소주 두세 병도 똑딱하겠어."

"그래, 나는 너를 전적으로 믿는다. 그러니까 빨리 술부터 시키자. 1차에서 바짝 마시고 당구나 한게임 치자."

술-당구-노래방-국밥으로 이어지는 그 익숙한 여정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심심한 인생이었지만 술자리만큼은 나름 싫지 않았으니까. 평소에는 말도 많이 안 하는데 그나마 술이라도 먹으면 두세 마디라도 더 하는 것 같다.

연거푸 소주잔을 두세 번 꺾다 보니 앞의 친구가 뒤쪽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애 보여?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인데 당구를 좀 치나 봐. 나름 동네에서 고수였다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너 웬일로 소식이 빠르네? 뭐야, 너 쟤한테 관심 있어?"

오래간만에 4구 기술이나 노래방 애창곡, 전공 얘기 말고 새로운 주제에 다들 마음이 둥실둥실했나 보다. 게다가 술까지 마시고 있으니 다들 눈이 초롱초롱하다. 생기를 찾은 미어캣들을 앞에 두고 K가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같은 고등학교고 같은 동네라서 대충 서로 얼굴만 아는 애라서. 건너 건너 같은 대학교 온 것까지는 들었었는데 우리 과인 줄은 몰랐네."

그 순간 그 아이가 뒤통수가 따가웠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K의 얼굴을 보고 눈인사를 건넨 후 다시 고개를 돌리는 그 3초가 3분 같고 3 시간 같았다. 술을 마셔서일까 생각해봤지만, 그런 알코올의 장난과는 달랐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단발, 은은한 베이지 색깔의 블라우스, 고개를 돌렸을 때 싱긋하던 눈꼬리. 잠시 멍 때리기에도 부족한 그 3초간 내 마음은, 머리는 핑핑 돌았다. 살다 살다 이렇게 긴 3초는 처음이었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이 옳았다.

"야, 너 괜찮아? 갑자기 술 세잔 꺾더니 사람이 멍해졌네."

멍한 것이 당연했다. 20년을 조미료 없이 살다가 갑자기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이 나는데 사람이 고장이 안 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퓨즈가 나간 나를 보고 있자니 K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쟤랑 얘기해볼래?"

등골에 전기가 쫙 흘렀다. 손에 힘이 탁 풀려서 들고 있던 술잔도 놓칠 뻔했다.

"어? 갑자기 왜? 나?"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사를 내뱉다 보니 말이 꼬여서 보니 입꼬리가 제맘대로 요동치는 탓이었다.

"아니, 평소엔 세상만사 별 관심도 없는 것 같던 애가 갑자기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놀라니까 그렇지. 나도 이런 거 영 잼병이긴 한데, 그래도 1차 끝나고 잠깐 말은 걸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떡할까?"

"아... 어, 음. 아 , 그래 좋아."

이번엔 K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파티원들까지 놀랐다. 그중에서 가장 놀란 건 나였는데, 그 놈들이 그런 걸 알았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1차가 끝나가고, 과대표가 회비를 걷으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3초 이후로 우리 테이블은 급격히 텐션이 올라 술을 들이켜면서도, 모두가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날 기다리는 부모님처럼 나를 보며 K와 다른 친구들은 신나서 술을 마셨다. 나는 물론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술이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 건 맞는지, 어디 몸 안에 다른 데로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게 멍하니 술만 마셔댔다.

"자, 이번 연도 첫 개강파티는 여기서 끝입니다! 2차, 3차 계속 가실 분들은 가게 나가서 저랑 부과대 앞으로 와주세요."

마침내 그 순간이 오고 말았다. 이미 술집 앞은 삼삼오오 모여서 다들 얘기를 나누느라 인산인해였고, 좁디좁은 동네라 다른 과 애들도 기차놀이하는 것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뭘 해야 했더라? 머리가 아직도 고장 난 나를 끌고 K는 그 애 앞으로 향했다.

"안녕, 너 xx고 이효진이지? 나도 xx고 출신인데 김민재라고 해."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같은 과에 고등학교 선배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오빠셨네요."

적당히 높은, 그렇지만 완전 하이톤도 아닌 목소리였다. 오빠라는 단어가 이렇게 간질간질한 단어였던가? 심지어 나한테 한 말도 아닌데?

"나도 건너 건너 우리 학교 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우리 과일 줄은 몰랐어. 앞으로 잘 부탁해. 아, 그리고 얘는 내 친구 재영이 야. 나중에 같이 당구라도 한게임 치자. 우리 술 먹고 자주 가거든."

K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까?

"아 안녕하세요 재영 선배. 저는 좋아요. 다음에 4구 치러 같이 가요."

"아, 안녕. 그래, 나도 좋아."

그렇게 기다려서 결국 한 말이라곤 다섯 단어가 다라니. 내 언어 실력이 원망스러웠던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효진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재영이 너 민재한테 한 턱 쏴야겠는데? 엄청 좋아하네, "

"어, 그래. 좋아."

"그래, 얘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이럴 것 같더라니까? 다들 들었지? 다음번엔 재영이가 쏜데."

고장 난 나를 구경하는 게 여간 재미있었나 보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자극적이었던 첫날은 그렇게 끝났다. 기껏해야 십 초도 안될 그 장면의 잔향이 너무 진하게 남아서 한 동안은 그 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전공동이나 과방을 지나치며 효진이와 계속 마주쳤다. 마주치고 인사를 나눌 때마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수명이 팍팍 깎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심장이 저릿한 이삼 주간을 보내고, 당구를 치기로 한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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