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6. 무덤, 반찬, 세포
부제 : 평탄과 안일의 줄타기
밑반찬이 맛있는 가게는 맛집이다. 이것이 내 식도락 철학이자 인생철학이다. 설렁탕 집에 가서 탕이 나오기 전에 깍두기만 먹어봐도 어느 정도 그 집의 관록을 가늠해볼 수 있다. 뭐든지 기본,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
취준생 때 면접 준비를 하면서도 항상 비슷한 생각이었다. 창의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이따금 내놓는 게으른 천재 타입보다는, 특출 나지는 못하더라도 맡은 일만큼은 꾸준히 해내는 둔재가 더 끌렸다. (물론 성실한 천재가 최고지만, 인생이 어찌 최상의 상황만 생각할 수 있으랴. 중요한 것은 차선과 차악 사이의 줄타기다.) 그런 근면한 가치관이 어필을 성공한 건지, 적당히 충분한 학력과 학점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취직에 성공하고 나의 취준 생활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여러분 개개인들은 이 큰 회사를 이루는 세포들입니다. 세포 하나하나만 보면 작지만, 세포가 기관이, 기관이 기관계가, 그리고 이윽고 회사라는 하나의 개체가 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꼭 필요한 인재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 잠시 쉬었다가 다음 세션 진행하겠습니다. 늦지 않게 자리로 돌아와 주세요."
으레상 치는 박수와 함성을 뒤로한 채 인사 담당자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제약회사다운 워딩이었다. 하지만 그 피라미드나 다단계 같은 체계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세포들이 차곡차곡 모여 하나의 큰 개체가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내 가치관과도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근데 결국 제약회사라는 게 약 하나만 대박이 나도 만사형통이잖아. 저런 레고 블록 같은 설명이 맞냐?"
"그렇지 뭐. 차라리 헬라 세포(HeLa)처럼 끊임없이 증식해서 대박 나주세요, 하는 게 맞지 않아?"
쉬는 시간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며 들었던 대화가 귀를 간질인다. 굳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 법전의 판례와는 달라서 판사가 혀를 끌끌 차고 있다. 결국 살아남는 건 일순간 점멸하는 폭죽일까? 매일매일 거리를 비춰주는 가로등의 공은 누가 치하해준다는 말인가? 이런 여러 생각들이 산란하는 순간에도 앞자리의 그들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요즘이 불경기라서 그나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온 거래. 우리 회사가 자연과학 쪽 배운 사람들한텐 거의 무덤이라잖아. 박사나 교수도 아니고, 연구소도 아닌 이 업계에선 제일 빡센 곳."
"신입사원 교육받으면서 벌써 회사 욕이냐? 근데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연봉도 나름 박봉에 야근도 잦다고 하긴 하더라. 뭐 어쩌겠어? 그나마 밥 먹고 살게 해 주겠다는데 말이야."
"그렇지? 뭐 평생 다닐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야근이 많다거나, 연봉이 상대적으로 적다거나 하는 것들은 내 인생 계획에는 없었다. 박봉에 야근까지 하면서 나를 회사에 불태울 생각은 없다. 적당히 1인분만 하는 평탄한 삶을 그리던 나의 청사진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크게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회사를 찾아 지원한 나의 탓일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노력해서 최고의 직장을 고를 열정까지는 없었다. 적당히 기본만 하려던 생각 때문에 기본만 하면서 살 수 없게 된 내 인생의 책임소재는 어디에 있나. 모순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그렇다고 퇴사를 하고 새 직장을 찾아 떠날 정도의 추진력은 없다. 평탄함과 안일함은 종이 한 장 차이였던가. 적당히 살려던 생각 때문에 적당히 살 수 없게 된 내 인생은 너무나 혼란했다. 갈색 나무로 둘러싸인 강당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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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5. 조미료, 고수, 파티
- 06 [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6. 무덤, 반찬, 세포
- 07 [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7. 종이, 옷장, 천국
- 08 [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8. 회색, 장비, 차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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