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7. 종이, 옷장, 천국

부제 : 종이 칼날

by 김주렁

나를 더 많이 다치게 하는 것은 서슬 퍼런 칼날보다 얇디얇은 종이다. 종이의 단면을 확대해서 보면 무수한 가시가 불규칙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베인다기보다는 톱처럼 갈리게 되는 것이다. 마냥 나의 부주의로 인해 다치지 않을 일에 손을 베이게 된 것으로만 생각했지만, 종이는 매끄러운 표면 속에 날카로운 속내가 감춰져 있었다.


종이로 만든 칼날이 있다면 딱 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드러운 표면 속에 감춰진 날카로운 속내를 가진 너... 아니다. 잔뜩 화가 난 터라 머리와 입 사이의 필터가 빠졌나 보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나는 너에게 너무 많이 베였다. 팔이며 등이며 생채기가 남아 아릿한 느낌이다.


편안함이 행복과 직결되지는 않았다. 처음 널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같이 있으면 너무 편안했기 때문이다. 금실로 테를 두른 양장본보다는 많이 읽어서 손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재질의 애착 소설 같았다. 같이 얘기를 하더라도, 커피를 한 잔 마시더라도 너무 편안했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 무렵, 나는 너에게 좋아하노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고, 너도 크게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우리의 이야기는 다음 챕터로 넘어갔다.


배려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식의 배려의 고리는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못한다. 오히려 이런 루프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내가 형이니까 내 말대로 하자." 식의 배려를 위한 폭력이 생겨난다. 더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 강요가 필요한 것은 참 아리송하다. 서로가 좋은 나머지 싫은 것도 없었던 우리는 항상 배려를 위한 다툼 아닌 다툼을 겪었다.

"내가 조금 기다리면 되니까 천천히 해."

"아니야, 그럼 내가 미안하잖아. 그냥 천천히 나와도 돼요. 내가 조금 기다리면 되지!"

배려의 고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선 한 명이 가위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아니야, 나 진짜 괜찮다니까? 먼저 나가서 기다릴게. 이따가 보자!"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고 자기 생각만 했으면 더 쉬웠을 것 같다. 선행과 선행의 다툼은 한쪽의 선행을 다치게 한다. 편안함은 안일함과 서운함과 볼을 맞대고 있다. 한 발짝만 넘어가면 서로가 편하다는 것은 서운한 감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는 곡해는 점점 서로에게 얕은 상처를 남겼다. 편하니까, 이 날은 이렇게 하더라도 이해해주겠지 하는 안일함은 종이로 만든 칼날 그 자체였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는 주인공이 옷장에 들어가 과거로 돌아간다. 성공할 때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결국에는 여자 친구가 원하는 미래를 찾아낸다. 우리에게 옷장이 있었다면 조금 달라졌을지 고민을 해보지만,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시작부터 이미 살짝 엇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숱한 반복을 겪었더라도 과연 우리는 서로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었을까? 편안함에서 시작한 그 순간부터 어쩌면 그것은 무리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서로에게 점점 식어버린 우리는 결국엔 헤어지게 되었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서로를 배려하는 말 뿐이었던 그 순간이 얄궂었다. 헤어지게 된 그 이유를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우리를 보면 결국엔 이렇게 될 일이었나 싶다. 마크툽(Maktub)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아랍어이다. 이미 쓰인 책의 결말이었나 싶은 생각에 괜히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불가항력, 기정사실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난, 실낙원 이후 사람은 죽음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죽음 이후 천국에 가던, 윤회하여 다른 생물이 되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히어로 영화 모 빌런의 "I am inevitable."이라는 대사도 결국은 본인이 필연적인 존재임을 암시한다. 우리의 헤어짐은 inevitable 한 상황이었을지, 아니면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낸 것일지는 미지수다. 이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해낸 생각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 삶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이 질문을 해보고 싶다.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은 불가항력이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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