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로 소설 써보기] 8. 회색, 장비, 차창

부제 : 적당함이라는 축복

by 김주렁

덜컹거리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매 순간 그 모습을 달리한다. 울창한 숲이었던 것이 흐르는 강물이 되기도 하고, 이따금은 터널로 들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도 한다. 분명 내 일상의 차창은 기껏해야 이삼십 분 움직이던 마을버스 차창이었는데 요즘엔 누가 그걸 떼서 KTX에 붙여놓은 것 같다. 눈도 핑핑 돌고, 속도 울렁거린다.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정신이 없다. TV에 나오는 맛집 사장님들의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라고 말하는 행복에 겨운 너스레가 아니다. 피고용인인 나는 고용인에게 달달 볶이고 있다. 잘 익은 양파처럼 카라멜라이징 되는 것도 아니고, 숯불에 태워먹은 삼겹살처럼 시꺼멓다. 탄 거 먹으면 암 걸린다는데, 그전에 내가 죽겠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이렇게 대중없이 바쁘지는 않았다. 소소하게 캠핑 장비들을 만들던 우리 회사는 코로나라는 미워 죽겠는 놈 때문에 반강제로 성장당했다. 적당히 팔고 적당히 벌던 사장님은 어느새 코로나와 자이브라도 출 것처럼 신나 있었고, 밑에 있던 우리만 죽을 상이었다. 사장님 금고랑 코로나랑 춤출 때 우리가 바닥에 매트 역할로 누워 잘근잘근 밟혔다.


"아니, 이렇게 장사가 잘 돼서 많이 팔 거면 사람을 더 뽑던지, 아니면 장비를 더 좋은걸 사주던지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무슨 사골도 아니고 국물 나올 때까지 우릴 건가?"

포장을 맡고 있는 지희 씨도 잔뜩 화가 났다. 그 전전 단계쯤에서 폴대를 개수에 맞게 세고 있던 나한테까지 화난 훈김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장님 귀도 철판은 아닌지라, 이런 여론을 모르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의 사정(이라고 주장하는 핑계)을 어필하며 매번 직원들의 원성을 핑퐁 쳐냈다. "요즘 좀 힘들지? 내가 다 아는데, 당장은 인원 충원은 좀 힘들 것 같아. 우리 조금만, 한 달 정도만 딱 고생하자고, 응? 이 철만 지나면 좀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장이라는 작자는 프로 가스라이터임에 틀림없다.


예전엔 회색을 별로 안 좋아했다. 회색 티도 싫고, 회색 차도 싫었다. '밝던지, 어둡던지 하나만 해야지 이 어정쩡한 게 뭐야!'라며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애매한 태도나 상황은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애매하고 적당한 것은 축복이다. 회색이야 말로 moderate 그 자체라는 말이다. 요즘 너무 죽을 맛이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미지근했던 일상이 그립다. "아 네 사장님. 내일까지 100세트요? 암요 되고 말고요. 내일 눈 뜨자마자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저놈 때문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깜빡깜빡하는 건 다 저 기름기 흐르는 사장 놈 때문이다. 이슬람교도들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드리는 것처럼 매일 매시 규칙적으로 사장 타도를 외치고 내적 시위를 거듭하고 있지만, 시위단원들이 내성적인지 내 가슴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내 속만 촛불 연기로 타 죽을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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