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동경(憧憬)하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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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민준
동경(憧憬)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저는 공교롭게도 동경(東京)의 한 숙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몇 달 만에 쓰는 편지 치고는 너무 영양가 없는 첫마디였나요? 너무 오래간만에 편지를 쓰려니 어색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주세요.
편지도 그렇지만, 살면서 이렇게 글과 멀어져 지낸 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요즘은 글과 소원하게 지내고 있어요. 전에는 세상을 읽듯이 살았는데, 지금은 그림을 보듯이 사는 것만 같아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런 생활이 나쁘지많은 않다는, 오히려 의외로 생각보다 만족스럽다는 거예요. 학원 강사만 꼬박 오 년을 했더라고요. 그 좋던 글도 업(業)이 되면서 좀 지긋지긋했었나 봐요.
아사쿠사에 와서 지낸지도 벌써 한 달은 지난 것 같아요. 하릴없이 산책하기도 하고, 매일 걷는 거리지만,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을 내고 싶은 날엔 센소지로 가서 기념품도 가끔 사요. 숙소에 강도라도 들었다 치면, 부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인 줄 알 거예요. 부채만 종류별로 벌써 몇 개를 산 건지 모르겠어요. 예쁜 그림을 보면 당신이 생각난다는 핑계로 잘 써먹고 있으니, 귀가 가려웠다면 사과할게요.
지금은 9월이라 아키바쇼*가 한창이라고 해요. 어렸을 때 명절마다 할아버지께서 보시던 씨름이 생각나서 몇 번 챙겨봤었어요. 씨름은 상대방을 바닥에 넘어뜨리는 경기라고 한다면, 스모는 그 외에도 원형의 경기장에서 상대방을 밀어내도 이기는 경기라고 해요. 원 안에서 상대방을 밀어내는 것. 나는 내 마음속에서 당신을 밀어낼 수 있을까요? 밀어내야만 할까요?
*아키바쇼 : 9월 둘째 주 일요일부터 15일간 개최되는 스모 대회.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지게 된 것도 이제는 벌써 세 달도 더 된 일이네요. 첫 한 달은 정말 모든 게 엉망이었어요. 당신이랑 자주 가던 카페 창가 자리, 퇴근하고 걷던 호수 공원, 차를 빼기 편하다고 좋아하던 주차장 오른쪽 끝자리. 참 별게 다 궁상맞게 보이더라고요. 진짜 좋아하던, 예쁜 풍경인데 딱 당신만 없는 거예요. 그 정신머리에도 또 책임감은 있었는지 애들 채점하고 상담도 해주고 할 건 다 했더라구요.
그렇게 학원 원장님과 옆반 선생님들의 안쓰러운 눈빛을 양껏 받으며 결국 한 달 만에 학원 그만뒀어요. 그렇게 별로라고 욕하면서 당신이 그만두라고 할 때도 못 그만뒀었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자니 심장이 저릿하더라구요. 그러고 며칠 안 지나서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어요. 눈에 박혀있는 그 풍경들에서 일단 벗어나자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통장잔고는 얼핏 보여서 일단 베트남으로 떠났어요. 거기서도 사실 반쯤 정상은 아니었어요. 이제 와서 너무 늦게 털어놓는 반성문 같지만, 그때는 조금 힘들어서 이런 편지를 쓸 여력도 없었는걸요.
그렇게 한 달을 바닷가 구경도 다니고, 못해본 수영도 해보고, 시장에서 과일도 이것저것 사서 먹어보고 하는데도 생각보다 막 재밌진 않았어요. 오히려 나는 죽을 맛인데 주변은 화사한 휴양지니까 괜히 그 낙차가 커져서 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느낌이 나서요. 그리고 지금은 결국 도쿄의 아사쿠사에 와있네요.
이제는 조금 사람이 차분해졌어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또 적응되어가는 게 썩 기분 좋지만은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거예요. 지금이 아니면 다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요. 내년 당신 기일때 이 편지 들고 갈게요. 미신 같은 거 둘 다 잘 안 믿는 편이긴 한데, 왠지 기일에 당신이 와서 이 편지 읽어줬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그럼, 이만 줄일게요.
2017.9.22.
From. 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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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글을 쓰려니 손가락도 아프고 머리도 저렸다. 평소 글 쓰던 습관 같으면 검교정도 하고 문맥도 볼 겸 다시 읽어봤겠지만, 이 편지만큼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틀리면 틀린 대로,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내 마음이다. 최대한 있는 그대로 남기고 싶다. 편지는 두 번 접어 흰 봉투에 넣어서 캐리어에 아무렇게나 넣었다.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은 TV에선 일본어로 이런저런 만담을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