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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감상문] 86 - 에이티식스 -

당신의 정의는 옳은가? 작품 내적으로도, 관객에게도 반문을 던지는 작품.

by 김주렁

0. 들어가기에 앞서


요 근래 본 애니 중에서는 가장 몰입하면서 봤던 작품이었다. 작화, 스토리 및 주제의식, 연출, 삽입곡 등 전반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높은 작품성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입문의 벽이 높았던 것 같다. 제목 및 키 비주얼의 유인효과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기본적으로 메카물이기는 하지만, 그 속내는 인간군상과 가치판단에 대한 질문들이 주를 이루었다. 에반게리온, 코드 기어스, (메카물은 아니지만) 블랙 불릿, 사이코패스와 그 결이 비슷했다. 고도화된 기술 세계에서도 결단을 내리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인간인 것이 위 장르의 흥미로운 점이다. 확률론적으로 합리적인 차선 혹은 차악의 선택을 내리는 기계의 판단이 아니라, 약간은 미흡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최선의 결과를 일궈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 감화되는 것이다. (설령 이에 수반되는 결과가 비극일지라도 말이다.)


제작사 : A-1 Pictures
방영 시기 : 2021년 2분기 (분할 2쿨 23화)

1쿨 줄거리 (출처 : 애니플러스)

기아데 제국에서 개발한 완전 자동화 무인 전투 병기 '레기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그 이웃 나라인 산마그놀리아 공화국이 개발한 무인 전투 병기 '저거노트'.

하지만, 무인이라는 건 이름뿐이었고 실제로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에이티식스가 탑승해 도구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에이티식스들로 편성된 부대 '스피어헤드'의 대장인 소년 신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절망적인 전장 속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기에 공화국 엘리트 군인인 레나가 새로운 지휘관제관 '핸들러'로서 부임했다.

그녀는 에이티식스들의 희생으로 성립되는 공화국 체제를 혐오하고 있었으며,
'인간형 돼지'로 불리며 업신여김을 당하는 그들을 인간으로서 마주 보고자 하였다.

죽음과 이웃한 최전선에서 싸움을 계속하는 에이티식스 소년과 장래를 촉망받는 재능 있는 엘리트 소녀.
결코 서로 마주할 일 없었을 터인 두 사람이, 격렬한 싸움 속에서 미래를 바라본다.


1. 에이티식스(86)라는 존재


영어로 86은 '내쫓다, 제거하다'의 뜻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작품 설정상 에이티식스는 산마그놀리아 공화국의 86번째 구, 즉 버림받은 구를 뜻했다. 작품의 주연이라고 볼 수 있는 신에이와 그의 동료들은 86구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백발의 백색 인종으로만 구성된 공화국에서 사실상 추방된 유색의 머리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공화국은 무인병기(저거노트)를 통해 국가를 지키고 있다고 TV를 통해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86구의 사람들이 저거노트에 탑승하여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벌이며 장기말처럼 쓰다가 버려지고 있었다.


대다수의 공화국 군인들은 86구의 사람들에게 전장을 맡기고, 그들이 죽어나가든 말든 괘념치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동조 장치를 통해 전장의 상황을 레이더와 음성으로만 확인하며 지휘만 하고 있으며, 죽은 인원은 또 다른 86구 사람으로 충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86구의 사람들은 이름도 아니고 코드네임으로만 불린다. 자리에 앉아서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다만 화면의 각 병사들이 실제 사람이고 실제 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이다.


공화국의 군인이 옳다는 것은 아니나, 실제로 현실감이 없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기껏해야 코드네임과 음성만 들리고, 심지어 본인들(백색 인종)보다 하등 하다고 생각하는 유색인종들이 공화국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대의적이고 다수를 살릴 수 있는 차선책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화국 사람들에게는 이 방식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의적인 합의는 86구 사람들의 희생 위에 쌓아 올린 금자탑이다. 사실만 보자면 86구의 사람들은 계속 희생되고 있다.


이런 86구 사람들의 희생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결과론적이고 대의적으로 차선의 선택을 잘 해낸 것인지 이 작품은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건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질문 자체가 딜레마라는 점이다. 이 상황은 트롤리 딜레마와 규모만 다를 뿐 동일하다.

덧. 트롤리 딜레마
당신은 두 갈래로 나뉘는 기찻길의 선로전환기 앞에 서있다. 선로를 위쪽으로 바꾸면 1명이 죽고, 아래로 바꾸면 5명이 죽는다. 이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사람이 죽게 된다. 위쪽에 2명이 있던, 3명이 있던, 아래쪽에 부자가 있던 당신의 선택에 따라 누군가는 죽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 목숨의 경중을 따질 수 있겠는가. 대의적 측면에서는 5명이 사는 게 합리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 생존은 한 명의 죽음 위에 이뤄진 것이다.


정답은 사실 정해져 있다. 무인 병기를 개발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정된 상황 속에서 오답 중 더 나은 오답을 골라내기를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대체 어디부터 잘못되었던 것인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질문의 대전제부터 잘못되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릇된 대전제를 바탕으로 한 불합리한 선택의 강요, 그리고 작품 내 인물들의 선택은 합당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반문, 이를 통한 관객의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 이 작품의 스토리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2. 블라디레나 밀리제(레나)와 그녀가 보여주는 포퓰리즘.


이런 일그러진 세상에서 숱한 좌절을 겪으면서도 이상론을 펼쳐나가는 것이 레나의 역할이다. 본인의 어린 시절 에이티식스(신에이의 형)가 자신을 구해준 것을 떠올리며, 레나는 공화국의 군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그들을 장기말이 아닌 인간으로 대하고자 노력하며,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또 공감하고자 한다. 말 그대로 최선과 차선, 차악의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론과 포퓰리즘을 펼쳐나가고자 하는 레나는 부적합한 인물이다. 하지만 끝내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들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86구의 죽음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전형적인 선역의 레나. 하지만 도덕적 옳음이 결과론적으로 항상 옳을 수는 없다. 또한, 레나가 선역이 되는 것은 나머지 군인들이 악역이 되는 결과를 수반한다. 도덕적이고 인류애적인 선택으로 인해 다른 모두가 죽게 된다면 이는 옳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레나의 86구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공화국을 멸망시켜 모두를 죽게 한다면 이는 합당한 선택일까? 작품은 이와 같은 이지선다의 질문을 건넨다. 이 질문의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야속하게도 결과밖에 없다.


무조건적인 정답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굉장히 기술적인 일이다. 이 작품은 양면을 병치하여 제시함으로써 두 쪽의 입장을 모두 고민해보도록 만드는 것에 능하다.


레나는 다른 군인들과는 달리 86구 사람들의 이름을 묻는다. 코드네임을 부르는 것과 이름을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발화와 음성적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름은 그 어떤 수식도 없는 나의 본질 그 자체이다. 직업, 신분에 의해 규정된 것이 아닌, 나라는 인물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각자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들을 장기말이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레나의 의지 표출이었다.


3. 저승사자 신에이 노우젠. 외골수. 업보와 굴레.


작품에서 저승사자로 불리는 신에이 노우젠. 그의 기체에는 목 없는 해골이 그려져 있다. (추후 이것은 노우젠 가문에 관련된 마크임이 언급되었다.) 전투 능력만 보자면 그는 먼치킨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너무나 기구하다.


86구의 사람들이 전쟁에 투입되는 현실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와 살아남은 자의 책임감은 모두 신에이가 짊어지고 있다. 신에이에게 주어진 저승사자라는 호칭은 적을 죽음으로 이끄는 공포의 대상보다는 죽은 동포들을 저세상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에 가깝다. 전장에서 죽은 동료가 적기인 레기온에게 붙잡히면 뇌를 빼앗기고 그들의 전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신에이는 부상을 입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동료의 목숨을 제 손으로 끊어낸다. 이때 그가 사용하는 권총은 저승사자의 낫의 역할을 한다.


그는 죽은 이들의 기체로 철판 조각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새긴 후 상자에 모으고 있었다. 신에이 자체가 위문의 매개체인 위령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살리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을 떠안고 본인이 죽을 때까지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신에이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되레 신에이에게 감사를 건넸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결국 해석해나가야 하는 것은 신에이의 몫인 것이다. 그런 그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준 것이 연방에서 세워준 실제 위령비이다. 그 비석에는 그동안 신에이가 모아두었던 동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신에이는 텔레파시를 통해 레기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 소리는 성불하지 못한 망령들의 소리였을 것이다.


또한 신에이 및 그의 동료들은 본인의 의지에 대한 선택을 중요시했다. 연방에 구조된 후, 그들은 전쟁에서 벗어나 일상을 영위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본인의 의지에 의해 죽음의 장소와 방법을 선택하고자 했다. 죽더라도 전장에서 죽겠다는 그들의 선택이 옳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애당초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잘못된 세상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타인의 연민, 배려에 의한 폭력이 뒤얽혀 복잡한 심정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4. 연방의 지도자 에른스트. 지위의 긍정적 남용.


작품 2쿨의 주요 무대인 기아데 연방 공화국. 그곳에는 기아데 제국 시대 이후 연방을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첫 등장부터 주인공 일행과 거리낌 없는 대화를 나누며, 굉장히 낙관적인 인물로 비춰진다. 하지만 마냥 착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며, 3국의 연합 사령관 자리까지 임명된 것을 보면 그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에른스트가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신에이 일행이 레일건이 장착된 통칭 '몰포'라는 레기온을 파괴하기 위해 작전을 수행하는 부분이었다. 계획에 따라 신에이 일행은 몰포의 앞까지 도달하지만, 알고 보니 이는 눈속임이었고 실체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 되레 역습에 당하고 통신기까지 파괴당한 그 순간, 사령부는 어떤 방향이던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 순간에 보여준 에른스트의 강단과 리더로서의 책무가 기억에 남는다.


다른 참모들은 작전의 실패를 직감하고, 미사일을 쏘아서 몰포의 이동 방법인 철로를 끊자고 제창한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몰포가 이동하지 않더라도 이미 주요 국가 사정권 내이며, 이는 미사일 낭비라고도 언급한다. 이 사태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게 낫다며, 그는 그의 권력과 지위를 마음껏 펼치며 모두를 제지한다. 그 후 다시 연결된 통신을 통해 신에이 일행의 생존이 확인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작전은 성공하게 된다.


차선도 아니고,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의 선택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하지만 눈앞의 단 열매를 마다할 지도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는 어찌 보면 편향적이나, 다르게 보면 본인의 신념에 올곧았다. 의미 없는 임시방편일바에는 멸망하는 게 낫다는 그의 말은 너무나 극단적이기는 하나, 대의적 측면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왕관의 이면은 책임이다. 그 책임까지도 모두 끌어안고 결단을 내리는 자가 바로 지도자이다. 리더의 책무에 대한 좋은 방향 제시였다고 생각한다.


5. 프레데리카. 몰락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


신에이 일행이 에른스트의 집으로 와서 처음 만나게 된 인물인 프레데리카. 사정이 있어 에른스트가 잠시 맡아주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 정체는 기아데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며 면식이 있는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2쿨의 최종 보스인 몰포가 프레데리카의 전 기사인 키리야 노우젠이었고, 그녀는 신에이에게 키리야를 없애줄 것을 부탁한다.


에른스트가 다소 낙관적이고 인류애적인, 본인 입장에서의 배려심과 이타심을 보여주었다면, 프레데리카는 같은 상황이라도 다양한 시점과 해석으로 상황을 풀어나가고자 하였다. 유독 기억에 남는 대사가 많은 것은 프레데리카였다. 기아데 연방에 구조된 신에이 일행에게 에른스트는 굳이 전장으로 다시 나설 필요가 없으며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해도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에이 일행은 본인들의 의지로 전장을 선택하고자 했으며, 이때 프레데리카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간신히 박해의 감옥에서 벗어난 저자들을 이번에는 동정의 감옥에 가둘 셈인가?


동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나, 어디까지나 주체는 동정하는 사람 쪽이다. 본인의 대의, 윤리적 선택 등 이유가 어떻든 간에 동정을 강요하는 것도 상대방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이 말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단순히 신에이 입장의 의견에만 동의하지 않고, 프레데리카는 이렇게도 말한다. 긍지 있는 자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불완전한 삶이라고, 단지 자기만이 자기를 규정하는 영혼은 자기를 잃으면 쉽게 무너진다고 말이다. 확실히 신에이 일행은 그 목적이 적절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우직하게 본인들의 신념과 의지를 밑거름 삼아 나아간다. 하지만 이 선택이 100% 옳고 합리적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프레데리카는 이렇게 양립한 상대방의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또 조언을 건넨다. 이런 심려 깊은 점이 인상 깊었다.


프레데리카는 추후 전장에 '마스코트'라는 역할로 함께 참전한다. 연방에서 말하는 마스코트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감으로써 일종의 응원과 인질 역을 맡기는 것이었다. 다른 부분은 꽤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편인 연방에 이런 제도가 있는 것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6. 메카의 형태 대하여, 다른 애니(블랙 불릿)와의 비교


작품의 기본은 공화국과 연방, 기아데 공국의 메카들 사이의 전투이다. 메카 디자인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적인 의견을 남긴다.


작품 설정을 바탕으로 고민해보면, 가장 처음에 무인병기를 만들고자 하였을 때 공국과 공화국 모두 인간에서 벗어난 형태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무인병기로 선전을 하기엔 되도록이면 사람에서 멀어진 형태가 거부감이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후 등장하는 레기온 상위 기종들도 사람의 형태보다는 곤충의 형태에 가깝다. 사람 형태의 병기들이 죽어갔다면 아무래도 일반 시민들이 보기엔 거부감이 더 컸을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메카 디자인이 선정되지 않았을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자면, 블랙 불릿의 적들도 대체로 곤충 형태를 띤다. 저격 능력을 지닌 거대한 개체(플레이아데스)도 등장한다. 다만 이 작품에서 싸우는 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이능력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들과 민간경찰이라 불리는 프로모터이다. 전체적인 구성을 보자면, 버림받은 아이들이 곤충 형태의 적과 맞서 싸운다는 형태가 유사한 것 같다.

에이티식스 - 블랙불릿

86구의 아이들 - 저주받은 아이들

레기온 - 가스트레아


이와 관련된 내용은 아니나, 연방 군인들의 별칭 또한 곤충이었다. (거미 여자, 식인 사마귀) 전장과 인류를 구분하고자 하는 반복적 메시지는 아니었을지 싶다.


7. 기타 소재들의 상징성


감정 동조, 패러레이터

공화국의 군인들과 86구의 인원들은 패러레이터라는 동조 장비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 장치는 이념적으로는 연결될 수 없던 두 집단 사이의 관계를 잇기 위한 물리적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통신이 아니고 동조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효과가 더 커졌던 것 같다.

스피어헤드. 창끝

신에이 일행이 공화국에 속해있을 때의 부대명은 스피어헤드, 창끝이었다. 마지막 몰포 격퇴 작전을 진행할 때에도 스피어 헤드라는 명칭이 다시 활용된다. 최전선이라는 의미를 잘 담아낸 단어였던 것 같다.



신체부위 중에서 유독 손이 중요 장면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 1쿨 과거 회상 장면에서 신에이의 목을 조르는 형의 손, 2쿨의 적인 키리야 노우젠이 마지막 순간 프레데리카를 보호하고자 만들어낸 손 형태. 공교롭게도 1쿨과 2쿨의 메인 보스에게서 유사한 형태가 보였다. 다만, 신에이의 형인 쇼레이의 인간 시절 손은 원망과 증오의 손으로 신에이에게 상처를 입혔으며, 이미 레기온이 된 키리야가 만들어낸 손은 프레데리카를 지켜냈다.


손은 상대방과의 접점 역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스피어헤드(창끝)와도 그 위치가 유사하다. 본인의 의지와 의사에 따라 악수를 건넬 수도 있고, 누군가를 공격할 수도 있다. 이런 손의 의미를 인간성의 상실과 엮어서 잘 활용한 것 같다.


덧. 손에 관심이 더 갔던 것은 에반게리온에서 초호기의 사람 팔이 처음 드러났을 때가 생각 나서였기도 하다. 인간이 아닌 로봇에 붙어있던 인간의 팔의 임팩트가 꽤 강력했던 것 같다.


8. 연출 측면에서


스토리 자체도 수려하지만, 이를 뒷받침해주는 연출들도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았다. 단순히 작화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영상 측면에서 활용을 잘 해낸 장면들이 많았다.


신에이의 머플러

신에이는 전장에서 목에 난 상처를 머플러로 가리고 있다. 연방에 구출된 후, 전쟁에서 벗어난 일상을 보내던 신에이는 갈등하고 있었다. 본인은 사관학교에 지원할 거라는 유진 란츠의 말을 듣고 나서 그 동생이 들고 있던 동화책(이전에 신에이와 그 동생이 동시에 집으려 했던)을 보니 저거노트에 그려져 있던 그림과 비슷한 해골 기사가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보고 신에이는 전장에서 벗어나 너무 오래 쉬었다고 얘기하는데, 이때 창 밖에서 나부끼는 천이 신에이의 뒷배경으로 깔리면서 마치 머플러를 두른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해낸다. 평화로운 도서관에 있더라도 전장에서 완전히 떠나오지 못한 신에이의 심정을 표현해낸 이 장면의 연출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분명히 평화 속에 있지만, 그의 본심과 의지는 그렇지 못함을 평화로운 도서관 소재들을 통해 보여준 것이 인상 깊었다.


평화로운 노래와 참극

2쿨 7화 엔딩 장면이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평화로운 노래가 나오지만, 뒷배경엔 총탄이 흩날리고 병사들의 대사는 너무나 긴박하다. 엔딩 크레디트 배경으로 이런 장면을 넣음으로써 전쟁은 끝이 없고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앵글 넘어서기

영화나 TV 등 영상 비율이 화면과 맞지 않을 때는 상하로 레터박스(Letterbox)가 생긴다. 2쿨 11화에서는 레터박스를 임의로 만들고 조작하며 화면을 의도대로 잘 활용해낸다.


해당 화 초반부에 신에이의 회상과 상상씬이 시작되고, 상하로 레터박스가 생겨난다. 그러나 신에이는 레터박스 밖에 홀로 서있다. 신에이는 동료들을 향해 손을 내밀지만, 레터박스에 닿아 손이 잘려나가고 만다. 그 후 레터박스가 점점 커지고 화면이 작아지며 동료들과 작별하는 장면을 연출해낸다. 연극과 비교하자면 제4의 벽을 넘어, 만화책과 비교하자면 만화 칸을 넘어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매우 흥미로웠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연출을 잘 보지 못했던 것 같아서 더욱 흥미가 갔다.


이후 신에이와 레나가 서로를 마주한다. 신에이는 레나를 봤지만, 레나는 기체 안에 신에이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레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먼저 떠나간 86구의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이 전까지 레터박스 안에 있던 레나가 레터박스를 넘어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이후 상하의 레터박스는 반투명의 흰색으로 바뀐다. 레나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너무도 멋진 연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9. 글을 마무리하며


작화, 음악, 스토리 등 한 분야만 특출 나더라도 기억에는 남지만, 이렇게 다방면으로 탄탄하면 정말 오래 기억에 남게 된다. 오래간만에 인상 깊게 본 애니메이션이었고, 생각해볼거리도 참 많아서 더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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