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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그 지독한 성장통-연애

- 그 소녀의 경험담 -

by 홍지승

그녀의 에피소드


어느덧 그 수줍은 성격의 아이는 18살 소녀가 되었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며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보고 싶으면 한번 놀러 와".....(중략)

그녀는 그렇게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난 뒤 떠나기 전에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에 동전이 떨어져 전화가 끊겨 통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길을 떠났다. 지금이야 기차연결이 잘 되어있지만 1980년대 당시 유럽은 이태리 최남단까지 기차를 몇 번이고 갈아타고도 꼬박 하루가 걸리는 먼 거리였다.

차비만 가지고 나와 물이나 밥을 사 먹을 수 없었지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이태리까지는 기차로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를 빨리 만나고 싶었던 그녀는 여기저기에 물어 겨우 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중략) '똑똑똑'

비극은 노크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그가 아니었다. 금발머리를 가진 그녀와 또래로 보이는 예쁜 아이가 눈앞에서 있었다. 뒤이어 그가 나왔다. 그녀를 본 그는 깜짝 놀라며 당황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어?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보통여자 같으면 화를 낼 만 도 한 상 황이었다. "왜 내가 오해할 말을 한 거야?", 혹은"내가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온 줄 알아?"라고 말하며 화를 삭이지 못하고 따귀를 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숙이고 바보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또다시 24시간을 달려 학교로 돌아왔다...(중략).. 하지만 그녀는 알게 되었다. 24시간을 내리 달려 50시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쫓아갈 수 있는 누구도 못 말리는 열정이라는 것이 그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겠지만 수줍고 나약한 주인공은 바로 나다.

강수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중에서



사랑의 방식


나약하고 수줍은 성격을 가진 소녀, 세상의 중심에 서다는 주제로 쓰인 그녀의 책 첫 장 프롤로그에 저 글이 실려 있었다. 소설처럼 읽힌 저 내용은 드라마의 한 부분인 것처럼 읽혔으나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발레리나 강수진의 이야기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리나로 불린 그녀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저렇게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나는 책을 읽다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무릎을 쳤다.

마치 그것은 발레 작품에서 나오는 지젤처럼 느껴져서인지 "맞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 말, 저 말 안 하고 그냥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며 가는 선택을 했을 것이고 지젤처럼 혼령이 되어 나타나더라도 상대방 남자에게는 뭐라 한 마디조차 못하고 눈물 흘리며 떠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고 보니 그건 마치 그 마음이 혹시 발레리나 스타일의 정서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발레 지젤을 떠올렸다.

사랑이든 아니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발레는 내게 자신의 감정에 먼저 더 취해서 타인에게 먼저 내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순간이 온다면 침착하고 의연하게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말은 힘이 세지 않다. 오히려 말보다는 행동이 더 무섭고 강렬하다. 그래서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면 그 순간의 침묵을 이겨내고 조용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상대방으로 더 깊게 바라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한 이유는 어쩌면 발레를 배운 뒤부터는 조급하고 나를 앞세우지 않는 나의 성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연극이라면 똑같은 상황에서조차 드라마틱한 서사가 가능하지만 춤은 내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억울해도 화가 나도 저렇게 아주 특별한 상황일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먼저 드러내고 따지라고 하지 않았다.

열정이 있되 그것은 어쩌면 오롯이 내 감정이라는 전제하에 그 감정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용가들은 말보다 움직임에 더 집중하는지도 모를 일이며 무릇 예술가의 연애의 방식과 성정이 일반인과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예술가를 바라보고 사랑하는가에 관해서는 분명 조심스러운 시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에 선천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그녀는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발레단의 수장으로 발레단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왠지 지금의 모습으로는 대쪽 같고 칼 같은 성격으로 'Yes or No'를 너무나 쉽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18살의 그녀는 지금과는 180도 다른 모습에 순수한 열정이 넘치던 소녀이었고 그때 그녀의 이 첫사랑은 그렇게 안타까운 그림으로 남게 되었다.




보통의 여자들과는 다른 정서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가정하에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발레 하는 여자들에 대한 선입견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선입견의 부분들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도 분명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발레리나들의 이미지 중에는 공주처럼만 자라, 공주 같은 삶만을 원하는 게 발레리나의 삶이라고 믿으시는 분들이 있기도 했지만 실제 가까이에서 본 그녀들의 삶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부분도 많이 있었다.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의 모습들을 일일이 다 비교하며 논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댄서들의 삶은 열정이 있어도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발레에게 배웠다. 너무나 사랑하는 감정, 내 안에 타오르는 활화산 같은 감정과 열정이 있더라도 상대방에게 그 마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어보기도 했고 그래서 드라마틱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제대로 한 마디 못 하고 돌아서는 그 모습조차 진짜 사랑이어서 그랬다고 믿어보기도 했다.



사랑 앞에 뜨겁지 않을 자(者) 과연 누구일까?


사랑 앞에 불타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좋았던 때가 지나 나빴던 때를 만나도 사랑 앞에서 조금 더 차분하고 겸허해지는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자신에게 선물 같은 감정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위대한 일이지만 그 사람을 사랑의 태도도 사랑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사랑을 하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대단한 일이며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내 마음을 누르고 내 사랑에 서두르고 들키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발레를 배우면서 가끔씩 내가 나 스스로 의아했던 부분은 내가 믿는 종교처럼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나의 탓'이었다. 누구를 먼저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언제나 나를 먼저 책망하고 꾸지람하는 일에 훨씬 더 익숙하게 살아온 탓에 상대방을 원망하고 탓할 순 있어도 상대방을 향해 직접적인 비난을 하며 먼저 화를 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내가 싫을 때도 많았고 바보같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고까지 생각이 들지라도 그렇다 한들 과정과 결과가 바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 부분들이 모여 지금의 삶이 되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그럴 때마다 그래도 잘 참아내고 화내지 않았던 순간은 가끔은 칭찬해 주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춤을 춰서 착해졌든, 착해서 춤을 추었든 간에 발레는 그렇게 내게 사랑의 기술의 첫 번째는 무엇보다 '배려'라고 알려주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강수진. 인플루엔셜.

대문사진: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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