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확, 상추 한 주먹
드디어 상추를 수확했다. 모종을 심은 게 아니라 씨앗을 심었다 보니 올라오는 싹이 많았고, 솎아주는 겸사겸사 수확해 보았다. 한 주먹씩, 한 끼 먹기에 약간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만.
한 움큼 쥐어보니 뿌듯했다. 올라오는 상추를 다 크게 기르기에는 땅이 작다. 그래서 작은 것들이 계속 자랄 수 있도록 어느 정도로 큰 것만 골라서 뽑는데, 잘못해서 새끼 상추도 잘못 딸려올 때가 있다. 그러면 조금 아깝기도 하다. 모둠 상추를 뿌렸더니 색도 알록달록하고 잎모양도 다양해서 볼 때도 먹을 때도 재미있다.
처음에 뽑을 때는 성큼성큼한 행동과는 달리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물 주던 기억과 밭 갈던 기억, 잡초가 올라오나 매의 눈으로 살피던 기억이 상추 작은 하나에 다 새록새록 떠올랐다. 할머니 댁에 가서 고구마를 캐고, 감자를 캐고 할 때와는 아주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 뽑은 상추를 아주 맛있게 먹고, 다음 날 또 수확하러 갔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이걸 반려식물로 보느냐, 먹을 것으로 보느냐의 차이인가. 아니면 그냥 한번 해봤다고 마음이 과감해지기라도 한 걸까.
무엇을 대하든지 간에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공유하는 이야기가 참 중요하다고 느낀다. 나, 내 것, 사람, 그 외의 것으로 분류하던 어렸을 적에는 동네에 보이는 온갖 풀을 죄책감 없이 뜯고 뽑았다. 꽃도 막 꺾었다. 예쁘니까. (물론 집에서 기르는 난초라고 내 손톱 사이에서 쉽게 생존하지는 못했다.) 식물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물 밖으로 꺼내 잡아들고 한참을 쳐다봤다. 돋보기 아래 개미를 두는 것도 한번 해볼 만했다.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교육을 통해 향상된 공감능력을 습득한 지금은 쥐 실험도 괜히 쥐한테 미안하다.
나에게 어떤 존재냐가 마음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친구도 친구기 이전에는 그냥 남이었지만, 서로가 지닌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시간을 쌓아서 가까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함께하는 시간을 담은 상추는 더 맛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 갑자기 비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져서 이식한 상추가 절반 이상 죽었다. 상추가 많이 올라오기는 하는데 물을 주다 쓸려내려 갔는지 한 구석에서만 오밀조밀하게 나고 전체적으로는 듬성듬성했다. 모여서 크는 것도 적당해야 잘 자라는데, 과하면 그냥 그대로 버티기만 해도 벅차다. 그래서 작은 상추를 한번 자리를 옮겨볼까 하고 모종처럼 이식을 해줬는데, 신기한 결과가 나왔다. 아주 어린 상추들은 뿌리가 짧아서 덜 상했는지 다 살아났고, 더 큰 상추들은 많이 죽었다. 그중에도 초록 상추는 많이 살았고, 적색은 많이 죽었다.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