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별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만난 것은 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 누나의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문학전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바로 <데미안>. 용기를 내서 읽기 시작했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문장을 중심으로 꾸역꾸역 읽어 내려갔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 데미안을 다시 읽었고, 그제야 먹구름이 어느 정도 걷혀 심오한 헤세의 작품 세계를 어설프게나마 즐길 수 있었다.
황야의 이리는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그 제목에 끌려 손을 댄 책이다. 나름 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예전보다 이해하기 쉬워졌으리라. 그것은 오산이었다. 난해하고 난해한 작품이었다. 일단 앞부분의 100페이지까지는 잘 읽히지도 않았다. 맛있는 음식이라 생각하고 먹었다가 맛이 없지만 남길 수 없어 꾸역꾸역 입으로 가져가는 기분이었다. 흑백의 오래된 무성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황야의 이리의 난해함은 정신적인 세계와 일상 현실의 화해라는 주제에서 비롯된다. 정신세계 혹은 내면세계가 그때 당시의 인기 있는 탐구주제였던 것은 어쩌면 전쟁이 일어나는 가혹한 현실,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오히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여유가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 당시 새롭게 대두되었던 심리학이 문학 작품에도 반영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헤세의 자아가 반영된 인물로 애인과 별거하고, 낯선 도시의 책으로 가득한 다락방에서 정신적인 분열을 겪는 사내이다. 심각하게 진지한 이 인물이 헤르미네와 파블로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고, 변화하면서 결국엔 정신적인 방황을 극복할 실마리를 유머에서 찾게된다는 내용이다. 헤세 자신이 <황야의 이리>에서 병적인 것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독자들이 죽음이나 몰락이 아닌 치유에 이르는 과정을 읽어줬으면 한다고 당부한데서 작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정신적 방황의 해결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황야의 이리를 읽으면서 잠깐이나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생각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이라 그런지 두 작품에서 미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시대적인 방황 혹은 방탕한 생활 같은 면에서 말이다. 마약과 섹스, 환락, 고급 창부, 동성애가 그려져 있는 황야의 이리는 1960년대 미국에서 헤르만 헤세 붐을 일으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작품이다. 그만큼 히피에게 사랑받을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젊은 여인인 헤르미네를 만나면서부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지만, 황야의 이리는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난해한 작품이다. 계속해서 주인공 하리 할러의 내면적 갈등을 그려주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독자에게도 내면의 붕괴를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물론, 철저하게 내가 느낀 바대로 쓴 것이기 때문에, 황야의 이리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으리라 생각된다.(황야의 이리를 읽고 가게 이름을 황야의 이리라고 지은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런 다음 다시 죽음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거예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보잘것없는 인생도 어느 순간 그렇게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거예요. p168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별이었다. p200
나는 이 위에서 그녀와 멀리 떨어진 채 누워 있었다. 그러나 나와 그녀 사이에는 어떤 끈, 어떤 물결이 이어져 있었고, 비밀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p283
수줍게 살짝 스치는 손길에서, 미숙한 사랑의 말 한마디에서, 가슴 졸이는 기다림의 순간순간에서 우리는 새로운 행복을 배웠고, 그때마다 사랑의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올라갔던 것이다. p284
자네는 죽기를 바라는 겁쟁이야. 살기를 바라지 않으니. 그러나 자네는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한다네. p.306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