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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랑심 Sep 27. 2022

Ep08. 출산 전 처치

임신 280일, 두렵고도 설레는 특별한 여행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을 호소력 있게 잘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시작 전 전체 개요를 설명함으로써 시청자들이 주제에서 벗어나 혼란스럽지 않도록 한다던지, 대부분의 항목을 3의 법칙을 활용해 3가지 항목으로 정리해서  발표한다던지, 발표 자료를 숫자보다는 큰 그림 1-2개 만을 사용하여 시각화해서 전달하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끝부분에서는  항상 "아, 그리고 하나 더."라고 말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쇼를 마칩니다.

오늘은 그의 프레젠테이션의 특징을 오마주 하여 강의의 문을  열어 봅니다.


어느 맘 카페에서 유명해진 말로  굴욕 3 종 세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출산 전에 하는 처치들인 내진, 관장, 제모가 수치스럽다는 의미에서 그  3가지를 묶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고 굴욕스럽다고 하는 출산 전 처치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 참. 그리고 하나 더. 

굴욕 3종 세트에 속해 있지 않지만 출산 전 처치에서  빠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회음부 절개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포함해 굴욕 4종 세트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우선 하나씩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내진--



내진은 먼저 강의에서도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더 설명드립니다.

내진은  자궁 경부의  부드러워진 정도와 벌어진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찰법입니다.  그러나 내진은 극히 사적 영역인 여성의 외음부를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 손을 넣어서 만져보는 진찰이라 여성이라면 어느 누구도 달가운 진찰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진은 과도하게 시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들은 다른 분야의 의사들과는 다르게 남녀 차별이 심합니다. 남자 의사는 인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수련받을 때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대 여자 산부인과 의사 비율이 10:1 정도로 남자 의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역전이 되어서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많지 않습니다. 보수도 여자 산부인과 의사가 월 1000만 원 정도라면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700만 원 정도로 더 적습니다. 이렇듯  아무리 의사는 성별과 관계없이 의사로 봐 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남자 의사라는 생각은 편히 진찰받는데 걸림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남자 의사에게 받던 여자 의사에게 받던 내진 진찰은 산전 진찰 동안  최소 한두 차례, 그리고 출산 진통 시 한차례 이상 받는 것은 필수입니다.

출산 진통 중 내진은 주로 촉진이지만 임신 초기 내진에는 시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혈액 검사나 소변 검사가 아닌 신체 진찰법에는 시진, 청진, 촉진, 타진이 있습니다.

시진은 눈으로 보아서 판단한다는 것으로 환자의 피부나 눈동자의 색깔 등을 눈으로 보아서 병을 진단을 하는 방법입니다.

청진은 청진기를 이용하여 심장 소리나 호흡 소리를 들어서 진단하는 방법입니다. 청진기는 심전도나 심장 초음파 검사가 개발되어 과거보다는 중요성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심장 이상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 가장 간편하고 저렴한 진찰 방법입니다.

촉진은 복부를 만지거나 피부를 만져서 진단을 하는 방법이며 산부인과의 내진도 여기에 속합니다.

타진은 두드려 보아서 나는 소리로 진단을 하는 방법으로  일례로 배가 부풀어 올랐을 때 복부에 복수가 차서인지  장에 가스가 차서인지를 구분할 때 쓰이는 진찰법입니다. 와인  공장에서 오크통을 두드려서 숙성 여부를 판단하던 방법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관장--



관장은 출산 시 나오는 변으로 인해 회음부가 오염될 가능성 때문에 하는 것을 추천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관장에 대하여는 하지 않기를 원하는 분도 있고 반대로  미리 관장을 해 주길 원하는 분도 있습니다. 관장을 하는 쪽이든 아니면 관장을 하지 않아 변이 나오는 경우든  어느 쪽이 되었든 둘 다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장에 대하여 지나치게 굴욕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입을 가글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의료적 처치의 하나일 뿐입니다.  관장에 대하여는  임신부의 생각이 어떤 쪽인가에 따라 결정하시면 됩니다. 대장 내시경 검사나 대장 수술에서는 관장이 필수지만 출산 전의 관장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관장이 필요 없이 출산 전에 미리 변을 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관장의 방법은 비눗물 관장과 글리세린 관장이 있습니다.  출산 전의 관장은 대개 비눗물 관장입니다. 설사약을 먹어서 관장을 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 관장법은 아니지만 약물을 이용한 관장으로도 해결되지 않아서 변이 직장에 꽉 차  있을 때는 손가락으로 변을 파 내는 손가락 관장법 (핑거 에네마)도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수련의로 지낼 때 환자로부터 가장 처음 촌지를 받았던 것도 손가락 관장 덕분이었습니다. 간성 혼수로 변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환자분을 위해 손가락으로 거의 30분 이상  변을 파내는 것을 보시던 보호자인 할머니께서 관장이 끝나고 나니 "학생 수고했어요." 하면서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인가 두장인가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지금 돈으로는 아마 일이만 원 정도 가치일 텐데 그분들께는 아마 큰돈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의사가 되고 처음 벌어본 돈입니다.


--음부 제모--



임신부의 음모 상태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입니다. 거의 없는 분도 있고 너무 많아서 도저히 제모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분도 있습니다. 

제모는 회음부 감염의 예방을 위해서 그리고 봉합 시 방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해야 한다거나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음모의 상태와 회음부 절개나 봉합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결정하면 됩니다. 물론 임신부의 의견도 중요합니다.

간혹 브라질리언 왁싱을 미리 하고 오시는 임신부들이 있던데 병원에서 의료진이 제모하는 것이 굴욕스럽다면 미리 하고 오는 것도 방법일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 브라질리언 왁싱은 비용이 일반 왁싱 샵에서는 5만 원 이상, 피부관리실에서는 10만 원 이상 비용이 든다고 하는데 산부인과 의원에서 의사가 하는 삭모에는 따로 책정된 비용은 없습니다. 그 모두는 다 분만 비용에 뭉뚱그려져 있으며 제모를 하던 안 하던 입원 비용에 차이는 없습니다.

산부인과에서 하는 회음부 제모는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에서 꼭 필요한 제모가 있습니다. 바로 뇌수술을 앞두고 머리를 깎는 제모입니다. 그때의 제모도 보험이든 비보험이든 비용을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제가 알기로는 따로 비용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음부 절개--


요즘 자연적 출산 과정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지면서  회음부 절개에 대하여도 논란이 많습니다. 자연주의 분만이란 분만 과정에서 의료적인 개입을 가급적 최소한도로 줄여서 자연적인 분만 과정을 따르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제왕절개나 흡입 분만과 같은 수술적 분만법 지양, 회음절개나 관장, 제모 등 의료 처치의 지양, 진통 촉진제나 자궁 수축제와 같은 약물의 사용을 억제하는 것 등이 포함됩니다. 

사실 회음부 절개를 해야 하는지 하지 않아도 되는지 여부는  임신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의사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대체로는  태아의 머리 크기, 질구의 넓이, 질구와 항문까지의 거리, 회음부 조직의 탄력성, 조산이냐 아니냐,  흡입기 사용 등 기계적 분만이냐 아니냐 여부에 따라 결정을 합니다. 물론 산모의 의견도 중요 고려 사항 중 하나입니다. 조산인 경우 태아 머리가 무르고 쉽게 뇌내 출혈이 발생할 수 있어 아기 두상이 작아도 대체로 회음부 절개를 합니다. 흡입 분만의 경우도 회음부 파열이 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미리 예방적 회음부 절개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음부 절개에 대하여 장단점을 살펴보면  교과서에 나온 회음 절개술의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음부 절개의 장점--

1. 상처를 봉합하기가 쉽다.

2. 출산 후 회음부 통증을 줄일 수 있다.

3. 요실금이나 질 이완증을 줄일 수 있다.

4. 측면 절개의 경우 항문까지 파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5. 아기의 두개 내 손상을 방지한다. 

회음 절개의 장점 중  회음부 통증의 경감이나 요실금 억제 등 몇 가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측면 절개의 경우 항문 파열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회음부 절개를 고려해야 하는 거의 유일한 이유입니다. 질을 넘어 항문 파열이 발생하면 그 후유증이 엄청난 질 직장 누공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회음절개의 빈도는 외국의 경우에서는 미국은 약 62% 유럽은 30%, 우리나라는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90% 이상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과 동양인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10 명중 7 명 내지 8명은 미리 회음절개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회음부 절개의 방법--



위 그림에서 흰 점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통상 회음절개를 시행하는 부위로 좌측 그림은 우측면 절개법, 우측 그림은 정중 절개라고 합니다.  우측면 절개 혹은 좌측면 절개는 분만 중 항문 파열 부작용이 가장 낮지만 통증이나 회복이 가장 느린 편이고 정중 절개는 장점과 단점이 회음절개를 하지 않은 경우와 우측 절개의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외에도  정중 절개는 봉합 후 통증도 적고 출혈양도 적고 성교통도 드물지만 무엇보다 항문 파열의 위험이 측면 절개에 비하여 높다는 것이 단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출산 전 처치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모두에게 불필요한 것일까요? 그도 저도 아니면 누구에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 없는 선택의 문제일까요?

사실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임신부 개인마다 그리고 의사 개인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제 개인적 견해를 말씀드린다면 그 모두는 하는 것을 권합니다. 다만 모든 임신부들께는 아니고 초산인지의 여부, 임신부의 피부나 질 등의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 임신부의 의견에 따라서 합니다.

임신부의 의견을 알기 위하여 저희 병원에서는 출산 계획서라는 것을 이미 작성하게 하며 아예 저희 병원의 산모수첩에 포함시켜 두었습니다.

아래는 그 내용입니다.


--남편의 참여--

1. 진통부터 출산까지 전 과정 참여

2. 진통 중에만 참여

3. 탯줄 절단 과정만 참여

4. 모두 참여 원치 않음


--출산 과정에서 유도분만 혹은 촉진제 사용 여부--

1. 양수 파수 후 24시간 이상 경과 시 사용

2. 양수 파수 후 48시간 이상 경과 시 사용

3. 예정일에서 1주일 이상 경과 시 사용

4. 예정일에서 2주일 이상 경과 시 사용

5. 평균 진통 시간 이상 경과 시 사용

6. 사용 원치 않음

7. 의사가 알아서 판단


--진통이나 출산 시 자세--

1. 자유 자세 진통 후 분만대에서 출산

2. 분만대 진통 후 분만대에서 출산 

3. 앉아서 출산


--관장과 음부 제모--

1. 관장 허용

2. 음부 제모 허용 

3. 둘 다 시행 원치 않음


--회음부 절개--

1. 파열이 많이 되리라 예상되는 경우만 절개

2. 시행 원치 않음

3. 의사가 알아서 판단


--분만실 환경--

1. 조명 어둡게 할 것

2. 조용한 음악 외 최대한 조용하게 할 것

3. 모든 소리 차단


--아기 관련--

1. 출산 직후 아기를 욕조에 담글 것

2. 탯줄 맥박 정지 후 탯줄 절단 

3. 출산 직후 아기는 임신부 가슴에 올려둘 것

4. 의사가 알아서 판단 


--모유 수유 관련--

1. 출산 직후 분만실에서부터 젖 물릴 것

2. 수시간 뒤 회복 후 병실에서 젖 물릴 것

3. 모유와 분유 혼합 수유할 예정

4. 모유만 먹일 예정


--산과학 서문--

오늘은 출산 전 처치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출산을 앞두고 이런 전처치를 하면서 저는  종교는 없지만   마음속으로 기도를 합니다. 오늘의 이 출산도 무사히 잘 끝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임신부와 남편을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아기를 위해서, 그리고 또한 저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산과학의 서문의 글을 떠올립니다.


"Obstetrics is art and science combined, and its practitioners must be concerned simultaneously with lives of at least two intricately interwoven patients--the mother and her fetus."

"산과학은 예술과 과학이 결합되어 있으며, 산부인과 의사는 적어도 두 명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환자, 즉 임신부와 태아의 삶에 동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문장에는 중요한 2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산과학은 임신부와 태아 2 생명 혹은 쌍둥이인 경우 3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산과학은 과학의 측면도 있지만  개인에 따라 같은 처방에도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는 예술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도 어렵기 그지없고 끝이 없는 길이며 예술도 그럴진대 그 둘이 합쳐진 산과학은 어떨까요? 당연히 어려운 학문입니다. 30년 가까이 산과학에 몸 담아온 저는 이제 막 산과학의 길에 접어든 전공의 1년 차 때에 비하여 과연 지금 제가 무엇을 더 많이 알고 무엇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30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언제나 미숙하기 짝이 없는 전공의 1년 차입니다. 출산 과정을 지켜보는 순간순간마다 항상 두렵고도 설레는 마음입니다. 임신부는 아마도 저보다 더하겠지요. 그러나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기를 바랍니다.

모든 임신부들의 순산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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