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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랑심 Jun 15. 2024

0. 서문

어느 분만 의사의 선택

"지금의 나는 과거에 한 선택의 결과이며 지금의 선택은 미래의 나를 만든다."


1991 년 3 월 16 일.

내가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시험에 통과하여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을 받은 날짜다. 의사 면허증을 딴 날로부터 5 년이 지난 시점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 년 6 월 현재로부터는 33 년 전이다. 내가 서울대학교 산부인과 교실에서 4 년 간 전문의 과정을 밟은 시간까지 더하면  산부인과 영역의 진료를 하면서 보낸 기간은 37 년 정도다. 그 기간의 대부분은 임신과 출산을 전문으로 하는 분만 의사로 보냈다. 그 기간 동안 내게는 사건이라고 할 만큼 기억에 남을 만한 몇 사례에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적어 보기로 했다. 


의사가 되어서 할 수 있거나 하는 일은 여러 가지다.  가장 대표적인 역할은 환자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다. 산부인과 의사도 마찬가지다. 다만 산부인과 의사 중에서도 임신 출산을 주로 다루는 분만 의사의 역할은 다른 분야의 의사들과 다르다. 임신과 출산은 병이 아니다. 그러므로 분만 의사의 주 역할은 병을 고치는 행위가 아니다.  병을 고치는 의료 행위가 아니라면 분만 의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출산하고 퇴원하면서 나에게 “선생님 덕분에 순산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전하는 산모와 남편에게 나는  “저는 아기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받은 것뿐입니다.”라고 말한다. 물론 약간의 겸양을 담아서 한 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분만 의사의 주 역할이 그것이다.  다만 아기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건강하게 산모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경과를 그대로 지켜볼지, 혹은 약물을 투여하거나 수술을 해서 출산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잘 선택해야 한다.

출산은  예정일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날을 기준으로 앞뒤로 1주나 2주 정도 기간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진통부터 출산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반나절 혹은 길어도 이틀을 넘지 않는다. 물론 그전에 9개월 반의 긴 임신 기간이 있었다.  그런 것처럼 적극적 개입과 세심한 관찰의 양 갈래 선택에서 어떤 쪽이 현명한 선택인지는 출산이 마무리되고 난 다음에나 알 수 있다.  현명한 선택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긴 시간의 배움과 많은 사례의 경험이 필요하다.

분만 의사가 다른 의사들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다른 진료 분야의 의사는  한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하는 반면에 분만 의사는 산모와 태아라는 두 생명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분만 의사의 사명은 당연히 두 생명 모두를 지키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렇게 되도록 출산 과정 동안에  즉시즉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잘못된 선택도 과정 중에는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나서 누구도  원치 않던 악결과가 앞에 놓였을 때 대가는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 모든 선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의사로서 내리는 선택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로서 내리는 선택의 결과는 때로 불가역적인 경우가 있다. 

불가역.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의미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생명을 잃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는 없다. 한 끼의 식사 메뉴를 잘못 조리해서 맛없는 식사를 제공하였다고 해서 요리사가 평생 원망을 받지는 않는다.  요리사도 고객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자긍심에 살짝 상처를 입을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자책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잃거나 되돌릴 수 없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을 때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당사자이든 보호자이든 의사이든 매한가지다.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즐거운 일이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그러나 의업에서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매우 무겁고 두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선택하려는 욕구는 타고나는 것으로,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그 욕구를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 생후 4 개월 밖에 안 된 영아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아기의 손에 줄을 묶고 아기들이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듣기 좋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줄을 끊고 음악 소리를 들려주자 아기들은 슬퍼하거나 화를 냈다. 줄을 끊고 나서 들려주는 음악의 분량이나 아기들 스스로 줄을 당겨 음악을 시작하게 했을 때 들을 수 있는 분량이 같도록 실험을 설계했는데도 말이다. 아기들은 그냥 음악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원했던 것이다.”

위 문장은 쉬나 아이엔가가 쓴 “선택의 심리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위 문장에서 보듯 선택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숙명이다.  누구나 살면서 숱하게 많은 선택을 한다. 그런 선택 중에는 하루만 지나도 기억하기 어려운 사소한 선택이 있는가 하면 인생의 행로를 크게 바꾸는 중요한 선택도 있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이 진다는 뜻이다.

나 또한 산부인과 의사로 살면서 그동안 숱하게 많은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도 의사로 사는 동안에는 산모와 태아, 부인과 환자들의 건강과 관련하여 계속 이런저런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내가 산부인과 의사로서 내린 선택과 결정 중에는 잘한 선택도 있고 잘못한 선택도 있다. 어떻게 잘했고 어떻게 잘못했는지 하는 것은 사실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면 구체적 과정과 결과에 별로 관심이 없을 듯하다. 다만 결과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하는 것과 관계없이 의사로 살면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들이 있었다는 점을 안다면 조금은 더 나와 같은 이들의 고충에 대하여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와 의사 간의 간극은 때로 너무도 커서 어떤 경우에는 서로 원수지간처럼 보이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 둘은 돈이나 권력을 두고 다투는 관계가 아니라 건강의 회복과 생명의 보호라고 하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그 둘이 신뢰에 바탕을 둔 건강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신뢰는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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