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내실.

by JunWoo Lee

서류 탈락을 거듭하는 취준생이었지만 나름의 지원 기준은 있었다. 마음이 가야 할 것, 인적성 테스트를 보지 않아야 할 것. 이 두 기준을 통과하는 곳에만 지원했다.


마음이 가는 곳이더라도 인적성 테스트를 봐야 한다면 지원하지 않았다. 인적성 테스트가 사람을 떨어트리기 위한 기계적인 수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 입장에선 수많은 사람 중에 뽑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성의를 보여 주는 곳에 가고 싶었다.


뭣도 없는 처지에 콧대만 높다 보니 대기업 중엔 지원할 곳이 거의 없었다. 결국 나는 스타트업 위주로 일자리를 알아 보게 됐다.


근데 내 구직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신입 기획자를 뽑는 스타트업이 많이 안 보였다. 아무래도 바로 일해 줄 즉시 인력을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취준생이긴 하지만 어디에도 지원하지 않은 시기가 더 길었다. 그럴 땐 내 개인 작업을 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감에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다 2019년에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공고를 봤다. 공고엔 신입 기획자를 인적성이 아닌 과제 전형을 거쳐 채용한다는 말이 써 있었다.


내가 세운 기준을 모두 통과했기에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채용 전형은 아래와 같았는데 공고에 써진 대로 과제 중심이었다.


1. 서류 과제

2. 면접 과제

3. 인턴 과제


기회 자체가 별로 없던 내겐 참 감사한 전형이었다. 그런 만큼 더더욱 정성을 들여 과제를 푼 기억이 난다.


서류 과제는 문제가 5개였는데 하루에 한 문제씩 정성을 다해 풀었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면접 과제까지 가게 되었다.


면접 당일 OT에서 다른 지원자들을 봤는데 긴장됐다. 내 두 눈으로 그렇게 많은 경쟁자를 본 게 처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저 사람은 얼마나 스펙이 좋을까 생각했다. 인턴 경력도 많고 공모전에서 몇 번씩 입상한 사람도 있겠지.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컸다. 나 자신이 마치 외딴 섬에서 혼자 지내다 상경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평소 하던 대로 하면 잘 될 거라는 누나의 응원이 생각났다. 갑자기 떠오른 누나의 응원 덕에 마음이 한결 진정됐다. 마침 OT에서도 과제만을 평가할 것이라는 안내가 있어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주변 사람보다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제를 시작하니 시간이 촉박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제 시간이 마무리 된 후에야 단체 PT 면접에 들어가 조원분의 과제를 볼 수 있었다. 나와 같은 과제를 진행한 사람들의 결과물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경쟁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과제를 보는 게 재밌었다. 사람마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 흥미로웠다.


다행히 이 날 나에 대한 평가가 괜찮았는지 난 면접 과제까지 통과했고 인생 처음으로 인턴을 하게 됐다. 이 일은 내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때 난 내실을 쌓는 것엔 정석적인 루트가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공모전 수상, 인턴 경험 하나 없는 내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하기 일쑤였다. 어떨 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근데 과제 전형을 거쳐 인턴에 합격하니 나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동안 혼자 착실히 점을 찍으며 다져온 나의 내실을 믿게 된 것이었다.


이 믿음은 인턴 과제를 하면서 강해졌다. 쟁쟁한 인턴 동기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면서도 내가 그들과 견줄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자신감 덕분에 움츠러들지 않고 역량을 펼칠 수 있었고 결국 최종 합격까지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찍어 온 점이 세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게 증명되어 뿌듯했다.


공모전 수상 이력, 인턴 경력과 같은 외실이 없다고 내실이 없는 게 아니었다. 물론 외실이 내실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한다는 말처럼 우린 결국 내실로 승부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 봐야' 한다는 점이다. 내실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꺼내서 다른 사람의 것과 견주어 봐야 할 때가 있다. 특히 나처럼 주로 혼자 프로젝트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외실이 없거나 적다는 이유로 지레 겁먹고 자신감을 잃는 일이 적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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