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든 인연.

by JunWoo Lee

똑똑한 사람이 많은 회사에 들어와 많은 걸 배웠다. 특히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부분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원래 나는 거의 혼자서만 무언가를 만들어 왔으니까.


내 생각을 상대방이 이해하기 좋게 다듬어 공유하고 논의하여 발전시키는 것.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일이지만 신입인 내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 성장하는 기분도 들었다. 메일과 기획서 쓰는 법, 동료에게 궁금한 걸 질문하는 태도 등. 회사에 다니지 않았다면 평생 익히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마음 한편에는 계속 아쉬움이 있었다. 회사에선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내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쓰는 서비스인데 내가 잘못 건드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있었다.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종종 내가 한 것들을 돌아봤다. 최근에 만든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과거로 추억 여행을 했다.


그러다 예전에 쓴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 오래 전에 쓴 것도 아닌데 이때는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고 문득 이걸 책으로 만들어 기념하고 싶어졌다. 마침 팔로우하고 있던 독립 서점에서 독립 출판 클래스를 연다는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민의 여지없이 클래스에 등록했고 독립 출판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가치 있는 한 걸음이었다.


클래스는 4주 동안 진행되었다. 수업을 들으며 글만 준비되어 있다면 책을 출판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클래스가 끝나고 얼마 뒤 을지로의 한 인쇄소에서 내 책이 만들어지는 것을 봤는데 감격 그 자체였다. 바쁘게 내 책을 찍어 내는 인쇄기를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책은 총 500권을 뽑았는데 그만큼 팔리지는 않았다. 완전 적자인데 독립 출판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얻은 게 정말 많기 때문이다.


일단 물성을 가진 첫 창작물이 생겼다. 내가 만들어 온 것은 워드 파일, 앱 서비스와 같이 만질 수 없는 무형의 것이었는데 품에 안을 수 있는 결과물이 생겨 좋았다.


비록 물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자취방의 수납장을 재고가 가득 채우고 있지만 책을 만질 때마다 기분이 좋다. 가끔은 책을 펼쳐서 종이와 글자의 냄새를 맡기도 한다.


그 다음으로는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마음이 가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연. 오랜 인연이 아닐지라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독립 출판에 발을 들이기 전엔 그런 친구를 만나기 어려웠다. 그런 것도 하는구나 하며 신기해 하는 게 보통이고 어떨 땐 그게 돈이 되는지 묻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 출판 세계의 분들은 달랐다. 요새 마음이 가는 게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걸 만들려고 하는지 재잘재잘 떠들게 된다. 또 각자의 책이 나오면 소식을 나눈다.


이렇게 마음의 샘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나누다 보니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아도 친밀한 게 아닐까 싶다. 어떨 땐 처음 만난 사람, 심지어는 대화를 안 나눠 본 사람에게도 친밀감을 느낀다.


이런 내적 친밀감 때문인지 독립 출판 행사에 다녀올 때마다 두 손 가득 책을 사오게 된다. 매번 절제해야지 생각하지만 속수무책이다.


누군가는 독립 출판된 책이 기성 출판사의 책에 비해 투박하다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래서 더 좋다.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투박한 기술로라도 책을 만들어 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돈, 명예와 같은 외부 조건이 아닌 나의 마음을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창작이라 느끼며 그걸 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내 마음 또한 충만해진다.


독립 출판 클래스를 함께 수강한 동기분들과는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자주 만나진 않지만 만날 때마다 즐겁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언젠가 책을 읽으며 우리의 인연을 표현할 구절을 발견했다.


확장은 경우에 따라선 허무할 만큼 간단하게 다시 축소될 수 있지만, 스며듦은 한 번 일어나면 입자를 화학적으로 잘게 분해하지 않는 한 원래대로 돌려놓기 힘든, 본질적인 변화다.

그래서 그들이 요란한 확장 대신 서서하고 고요한 스며듦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나 미더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이게 그들의 방식이지. 그들은 언제나 무심한 듯 곡진하다.

- 책 <읽는 사이> 중


독립 출판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인연. 앞으로도 함께 마음의 샘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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