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듯 쓴 단편소설 #15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두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소재는 서브스턴스였다. 서브스턴스에는 물질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언가의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종말을 일주일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봤다.
퉁퉁퉁퉁퉁퉁퉁퉁퉁 사후르...
트럭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휴대폰을 보며 실실 웃었다.
“그게 뭔데 그렇게 웃어요?”
조수석에 탄 여자가 물었다.
“이거 몰라요? 이탈리안 브레인 롯. 저희 10대일 때 유명했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몰라요. 동물들이 다 기괴하게 생겼어요.”
“AI로 만든 영상이라 그래요.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해서 웃기다 해야 되나.”
“어처구니가 없기는 하네요.”
여자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 진짜 유쾌해요. 인류 종말 기념 밈 총집편이라니.”
남자는 영상을 이어서 봤다. 검게 변한 화면 위로 ‘B.C. 3200 ~ A.C. 2045 지금까지 인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떴다.
“죽음을 달랑 한 주 앞두고 그런 영상을 만드는 게 신기하네요.”
“각자만의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거겠죠. 민서 씨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죠?”
“음. 잘 안 봐요. 전이나 지금이나. 민철 씨는 좋아하나 봐요.”
“지금처럼 트럭에 물건 실을 때까지 대기 시간이 좀 있거든요. 그럴 때 이런 거 보면서 시간 보냈죠.”
“의외예요.”
“어떤 게요?”
“뭔가 이런 일에 지원한 사람은 그런 거에 관심 없을 거 같았어요.”
“민서 씨는 이 일에 왜 지원한 거예요?”
“인류의 유산을 남기는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허송세월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긴 싫어요.”
“사명이 있으시네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민철 씨는요? 평소에 문화재나 예술 작품에 관심이 있었어요?”
“아뇨. 마지막으로 미술관에 간 게 고등학생 때였어요. 아니다. 거기가 박물관이었나.”
“그럼 어쩌다가 이 일에.”
“매일 같이 트럭 몰면서 도로 위에 살았더니 주위에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 지나치듯 아는 사람뿐이고. 혼자 방에 틀어 박혀 있다가 죽긴 싫었어요.”
“가족들은요?”
“형제는 없고 엄마가 저 홀로 키우셨는데 몇 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힘드셨겠어요.”
“엄마가 투병 생활에 지쳐서 마지막엔 터미널 케어 병동에 갔어요.”
“터미널 케어 병동이 뭐예요?”
“불치병 걸린 환자들이 최대한 편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에요. 거기에 있다가 금방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갈 때는 편하게 가셨죠. 왜 이렇게 일찍 가셨나 했는데 제가 더 짧게 사네요.”
“그래도 어머니를 잘 보내드리셨다니 다행이에요.”
“제가 갑자기 너무 무거운 얘기를 했네요. 근데 민서 씨는 제가 상상하던 미술관 큐레이터랑 이미지가 비슷해요.”
“그게 어떤 이미지인데요?”
“약간 차분하고 점잖은 느낌? 릴스나 쇼츠 이런 거 잘 안 보고. 죽음을 앞두고도 존엄을 지킬 것 같아요.”
민서는 지저분한 트럭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했다.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단발머리와 구김 없는 검은색 셔츠와 슬랙스. 곧바로 미술관에 가서 일해도 될 차림이었다.
“민철 씨도 제가 상상한 트럭 운전사랑 비슷해요.”
“그게 뭔지는 묻지 않을게요.”
민철이 웃으며 말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그만큼 우리가 각자의 직업에 열중한 거겠죠.”
“그러게요. 죽음을 앞두고도 이렇게 하던 일을 하고 있으니. 잠시만요.”
민철은 트럭 왼쪽을 지나가는 남자를 보더니 창문을 내렸다.
“물건 싣느라 고생하셨어요. 저희 슬슬 출발할게요.”
“네네. 고생 많으십니다.”
“저희는 장민철, 김민서라고 해요.”
“아. 저는 정윤재라고 합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
“두 분도 좋은 한 주 되세요.”
민철이 남자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자 민서도 같은 방향으로 엉거주춤 목례를 했다. 트럭이 출발하고 민서가 백미러를 보자 남자가 얼마간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멋대로 이름을 말해서.”
“괜찮아요. 친절하시네요.”
“왠지 그러고 싶었어요. 삶 막바지의 기억을 기분 좋게 채우면 좋잖아요. 서로에게 남기는 마지막 인상이기도 하고.”
민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화장실은 어때요? 남자 화장실은 개판이던데.”
“여자 화장실도 그리 깔끔하지는 않아요. 앞에서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미친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왔네요. 재난 영화 보면 사람들이 트럭에 좀비처럼 달려들었거든요.”
“아마 모두에게 가망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다들 포기하고 끝을 받아들인 거겠죠.”
“임팩트는 모두에게 공평하네요. 민서 씨는 이 일이 끝나고 뭐 할 거예요?”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일을 돕지 않을까 싶어요.”
“가족들이랑은 시간을 안 보내고요?”
“사실 저도 남은 가족이 없어요. 저 대학생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죄송해요. 제가 그런 줄 모르고.”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땐 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을 했지만. 부모를 가질 운명이 아닌가 생각도 하고.”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아기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거였어요.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모 모두 잃다 보니 별 생각을 다 했죠.”
“아. 그랬군요.”
“죄송해요. 아까 민철 씨 얘기 듣고 저도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아뇨. 괜찮아요. 한국 부모님은 찾았나요?”
“이유가 뭐든 저를 버린 사람들을 찾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쪽에서도 저를 찾으려 하지 않았고요.”
“어떻게 견뎠어요. 대학생 때는 받아들이기 더 어려웠을 텐데.”
“부모를 대신해 줄 뿌리를 찾다가 한국에 온 거예요. 그러다 한국 전통 예술이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거고. 일에서 소속감을 찾으려 했죠.”
“저도 엄마가 돌아가시곤 일만 하면서 살았어요.”
“그렇게 되나 봐요. 보통.”
잠시 정적이 흐르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 민철은 민서를 쳐다봤다. 민서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민철은 휴지를 뽑아 민서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아. 그것도 있지.”
민철은 뒷좌석 쪽으로 몸을 돌려 맥주 두 캔을 꺼내 왔다.
“맥주 아니에요?”
“무알콜이에요. 업무 중이니까. 기분이라도 낼 겸.”
민철이 캔 뚜껑을 따자 민서도 따라서 캔을 땄다.
“짠.”
민철이 민서에게 캔을 내밀었다.
“짠.”
둘은 웃으며 건배를 했다.
“그러면 저희의 뿌리를 보존하러 마저 가 볼까요?”
“좋아요.”
민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두 분 고생 많으셨어요. 덕분에 난중일기에 이어 팔만대장경도 세상에 남길 수 있게 됐네요.”
한 여자가 민철과 민서를 마주 보고 앉아 말했다.
“팔만대장경의 극히 일부지만요.”
민서가 말했다.
“다 가져오기는 어렵죠. 그래도 민서 씨가 그중에서도 중요한 판본을 잘 골라 주셔서 다행이에요.”
“고르면서도 어렵더라고요. 욕심이 많았는데 민철 씨가 최대한 많이 실을 수 있게 힘써 주셨어요. 운반 중에 손상도 안 되게 운전도 잘해 주시고.”
“매일 하던 일인데 칭찬받으니 기분 좋네요.”
“지연 씨도 마지막까지 고생 많으세요.”
“고생은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오히려 재밌어요.”
“종말을 앞두고 재밌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민철이 말했다.
“제 일이 이렇게 세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느낀 건 처음이에요.”
“유네스코에서 일하고 계시죠? 저도 거기 관심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분 보니까 신기해요.”
“전에는 저희가 하는 일이 그저 명목상에 불과하다 느낀 적도 있어요. 근데 이제 종말을 앞두니 그동안 저희가 해 온 고민이 빛을 발하네요.”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 프로젝트 덕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 빠르게 정리되었어요. 말 그대로 인류의 유산이니까요.”
“민서 님, 민철 님처럼 도와주신 분들 덕이죠. 한국에 특히 기록 유산이 많아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이에요. 다들 팔만대장경은 꼭 확보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종말을 앞두고 보니 의미가 남달라요.”
“재건에 대한 희망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유산이에요.”
“재건이요?”
“인류 재건이요. 종말을 일주일 앞둔 상황에서 무슨 소리냐 하실 것 같은데. 이것과 관련해 두 분께 드릴 설명이 있어요.”
민서와 민철은 눈이 동그래져 지연을 쳐다봤다.
“임팩트 이후 인류의 재건을 꿈꾸는 샹그릴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어요. 지금 팔만대장경과 같은 유산을 모으는 일도 그중 하나죠.”
“뉴스에서는 스피어라는 소행성을 막을 수 없고 지구에 떨어지면 다 죽는다고 했는데.”
민철이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렇죠. 다만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 지구에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때가 올 거예요. 그때를 위한 재건 사업이에요.”
“어딘가 벙커가 있는 건가요?”
민서가 물었다.
“아쉽게도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 벙커는 아니에요. 대신 저희는 사람들의 정신을 서버에 복제하기로 했어요. 사람들의 정신이 담긴 서버를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볼트에 보존할 계획이에요. 인류의 유산과 함께요.”
“제가 살아남는 건 아니고 제 복제본을 백업해 놓는 거네요. 그럼 언젠가 서버에 복제된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 재건을 시작하는 건가요?”
민철의 질문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진행되는지 몰랐어요. 유산을 모으는 일도 스스로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누군가 장례를 준비할 때 누군가는 장래를 준비했네요.”
민철의 농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진지한 얘기 하는데 죄송해요. 못 참고 입에서 튀어나왔네요.”
“아니에요. 민철 씨 말대로 저희는 인류의 장래를 준비하고 있어요. 유산을 모으는 일은 우리가 실재했다는 걸 훗날 깨어날 인류에게 증명하기 위해 시작됐죠. 그들이 스스로를 조작된, 한낱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지연의 말에 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서버에는 어떤 사람들의 정신이 복제되는 거예요?”
민철이 물었다.
“모두가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정신을 서버에 복제하는 다이브 장치가 많지 않아서요. 대외적으로 비밀로 하고 인류 재건에 필요한 분들을 선별했어요. 두 분도 명단에 올라가 있으세요.”
“저도요? 저는 그저 트럭 모는 사람일 뿐인데.”
“재건에 가장 필요한 건 인류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죽음을 앞두고도 인류의 유산을 남기는 데 힘쓰는 두 분처럼요.”
“만약 정신을 복제한다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민서가 물었다.
“비행기를 타고 노르웨이로 가야 돼요. 다이브 장치가 그곳에 있거든요. 이미 여기 오신 분들 대부분 떠났어요.”
“그럼 유산을 모으는 일은 멈추는 건가요?”
“유산도 중요하지만 인류 재건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렇겠네요.”
민서는 그 뒤로 말을 잇지 않았다. 민철은 고개를 떨군 민서를 봤다.
“지금 바로 결정해야 되는 건가요?”
민철이 물었다.
“오늘까지는 결정해 주셔야 돼요. 정신을 복제하려면 사전 검사가 필요해서 내일 안에는 노르웨이로 떠나야 되거든요.”
“지연 씨는 언제 가세요?”
“저는 이미 복제하고 왔어요. 아마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시간상 저희는 가면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겠네요.”
민철의 말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 말씀드려 죄송해요. 재건 프로젝트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해해요. 좀 고민해 볼게요. 저나 민서 씨나 고민이 필요해 보여서.”
“네. 자리 비워 드릴게요. 고민해 보고 말씀해 주세요. 옆방에 있을게요.”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민서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민서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저 자신을 세상에 복제해 놓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이런 고민은 처음이네요.”
“모두한테 처음이겠죠. 뭐가 됐든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는 거 같아요. 근데.”
민서가 민철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면 이건 민서 씨가 유산을 모으는 일과 같은 일 아닐까요. 유산이든 민서 씨든 인류의 재건에 필요하니까. 사실 유산보다 민서 씨가 더 중요하죠.”
“그런가요.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그래요.”
민철이 애먼 곳을 쳐다보고 말했다.
“민철 씨는 따뜻한 분이네요. 음. 누군가에겐 제가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인류의 차원에서는 과연 정말 그럴까요.”
“지연 씨가 그랬잖아요. 재건은 결국 사람이 하는 거라고.”
“어쩌면 저는 그저 뿌리를 남기고 싶은 걸지도 몰라요.”
“그러면 이곳에 남을 생각이에요?”
“아마도요. 여기 남아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찾아봐야죠. 지연 씨 일을 도울 수도 있고. 민철 씨는 정했어요?”
민철은 잠시 고민을 했다.
“저도 여기 있으려고요.”
“왜요?”
“좁은 트럭 안에서 너무 오래 지내서인지 인류 재건 얘기는 너무 거창하네요. 정신을 어딘가에 백업한다는 것도 와닿지 않고.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매한가지니.”
“그것도 그렇죠.”
“그럼 저희 둘 다 여기 머무는 걸로 결정된 거 같네요.”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에 못 실은 팔만대장경이 생각나네요. 민서 씨 저희 해인사 갈래요?”
민철이 말을 마치고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민서를 바라봤다. 민서는 민철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마마! 여기엔 좀 다른 글자가 쓰여 있어요.”
“그건 임팩트가 일어나기 전 팔만대장경을 보존해 준 분들의 서명이란다.”
“이 글자는 어떻게 읽어요?”
아이의 질문에 마마가 목판 뒷면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민서, 민철 이 세상에 잠시 다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