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Aug 09. 2023

자꾸 지갑을 열게 만드는 아이의 말  

반지란 원래 그런 거니까 


아이랑 같은 날 휴대전화를 하나씩 새로 샀어. 그리고 3년도 되지 않았으니 내 폰은 당연히 아직 쓸만했지. 그런데 아이는 벌써 새 전화기를 샀어. 그것도 화면이 터치가 안 된다는 소리를 몇 달째 듣고도 모른 척하다가 겨우 새로 사 준거란 말이야. 물론 사 주기 전에 잔소리가 당연히 있었겠지. 


“전화기가 한두 푼도 아닌데 잘 써야지! 엄마 건 아직도 새 거거든!”


그랬더니, 아이가 뭐라는 줄 알아?


“당연하지!”


당연하대. 뭐가 당연해? 사십 대는 잘 쓰는 게 당연하다는 거야. 십 대인 자기는 험하게 쓰는 게 당연하대. 원래 어른들은 잘 쓰는 거고, 애들은 던지고 험하게 쓰는 거래. 그래서 금방 고장 난대. 내가 가만히 있을쏘냐. 그래서 외쳤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데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더라고. 내가 더 오래 살았잖아. 나이를 먹은 만큼 경험도 쌓였고.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고. 그런 사십 대와 아무것도 모르는 십 대의 생각이 어떻게 같겠어. 십 대가 아무리 돈의 소중함을 안다고 해도 사십 대 만큼은 모르겠지. 어른들이 이만큼 살면서 느껴온 걸 십 대인 아이가 똑같이 느끼길 바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인지도 몰라. 어른들이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잖아. 우리도 그랬잖아.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지금 하는 고민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는 직접 겪어 봐야 알겠지. 시간이 흘러야 알겠지. 결국 아이가 생각하는 (엄마 아빠가 사 주는, 금방 고장 나면 또 사줄) 전화기와 내가 생각하는 (아주 비싼, 그래서 잘 써야 하는) 전화기는 정의 자체가 달랐던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백만 원 가까이하는 전화기를 잘 써야 하는 건, 돈을 벌어봤든 아니든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맞긴 한 대. 그런데 듣다 보면 말려든다니까? 나만 그럴까? 혹시 아이의 궤변에 말려들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 축하해! 당신은 멋진 사람! 


나는 홀랑 말려들어 버렸고 그래서 결국 새 전화기를 사줬다니까. 그런데 그 새 전화기를 가끔 케이스도 안 끼고 들고 다닐 때가 있단 말이야.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 건 나뿐이야. 저렇게 다니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액정에 실금이라도 가면! 나만 심장이 콩당콩당하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이들은 떨어뜨리는 게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케이스를 하고 다녀야지!’라고 내가 외치겠지? ‘케이스 없이 전화기를 쓰고 싶은 날도 있잖아!’라고 하면 또 고개를 끄덕여버릴 것 같아.

어디 전화기 뿐이겠어? 집에 반지가 좀 많아. 다 아이 반지야. 제 방 화장대 위에도, 공부하는 책상 위에도, 현관문 앞 선반 위에도, 식탁은 물론 계단 구석에도. 내가 사준 것도 있고 자기가 인터넷으로 직접 주문한 것도 있어. 그런데도 어딜 가서 반지만 보면 사달라고 난리야.


그러다 제주 여행 도중 길거리에서 몇 만 원짜리 반지를 사 주면서 이제 더 이상 네 반지는 사주지 않겠다 다짐했지. 그 다짐을 잘 지키고 있었는데, 지난주에 조호바루에서 두 시간 반 걸리는 작은 도시 믈라카에 다녀왔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야. 온갖 쓸데없는 것들과 간식거리를 파는 주말 야시장으로 유명해.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떠밀려 다닐 정도야. 싸구려 액세서리를 파는 곳도 당연히 있었겠지? 당연히 신나게 껴보고 난리를 쳤겠지? 물론 나도 같이 했어. 아이는 역시나 반지를 사달라고 했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반지를 사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잖아? 그래서 첫날은 잘 버텼어. 하지만 숙소 바로 앞이 야시장이라 어딜 가든 시장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틀째 되던 날 밤 결국 아이한테 굴복하고 말았어. 아이가 그랬거든. “그게 반지야.” 무슨 말이냐고? 


“너 집에 반지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내가 이번에 집에 가서 한 번 세어봐야겠다. 1층에 굴러다니는 것만 열 개가 넘고 네 화장대 서랍에, 화장대 거울 앞에 등등 한 오십 개는 넘을걸?” 


“에이, 아니야. 오십 개는 안 될 거야.”


“아니, 되거든! 끼었다가 여기 벗어놓고 저기 벗어놓고 하니까 어디 있는 줄도 다 모르잖아! ”


그랬더니 아이가 한 말이 바로 그거야.


“그게 반지야.”


두둥! 그게 반지래. 반지는 원래 그런 거래. 원래 굴러다니는 거고. 원래 한 두 번 끼고 마는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쁜 게 보이면 볼 때마다 사는 게 바로 반지래. 


아, 나는 또 묘하게 설득 당하고 말았어. 아, 그게 반지구나. 아이는 반지의 정의가 나랑 완전히 다르구나. 모름지기 반지란, 서랍 속에 혹은 작은 케이스에 잘 정리되어 있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의상에 따라, 귀걸이에 따라 어울리는 걸 하고 나갔다가 또 돌아와 제 자리에 잘 정리해 놓는 것. 비슷한 게 있으면 안 사는 것. 그게 반지 아니던가? 그런데 그건 내가 내린 반지의 정의고, 아이가 내린 반지의 정의는 그게 아니었던 거야. 반지란 원래 볼 때마다 하나씩 사는 것. 원래 정해진 자리 같은 거 없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 여기서 끼었다가 저기서 빼놓는 것. 집에 나의 흔적을 남겨 놓는 것. 그런 거였던 거야. 


나는 결국 반지를 사주고 말았어.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오는 길에 보니 차 안에도 반지가 하나 굴러다니고 있더라고. 내가 말했지. “이 반지는 왜 또 여기에 있어?”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했어. “뭐, 반지가 차 안에 있을 수도 있지”


그래, 나는 이미 아이의 새로운 정의를 학습한 거야. 집에 도착해서 아이가 반지를 차고 내렸어. 그런데 몇 시간 후였던가. 그 반지가 어느새 내 손가락에 떡 하니 끼워져 있네? 아니, 내가 언제 이걸 낀 거야? 아니, 반지가 살아있는 물건이었어? 제 발로 내 손에 온 거야?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데 웃기지? ‘반지가 원래 그런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아이가 어느 순간 어딘가에 빼놓으면, 내가 돌아다니다가 심심해서 내 손가락에 한 번 끼워 보는 것. 그렇게 집안 구석 여기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작고 반짝이는 물건. 여기 내가 살고 있다는 흔적. 이 차를 내가 타고 다닌다는 흔적. 이 가방은 내 것이라는 그런 흔적. 강아지가 전봇대에 오줌 싸듯이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놓는 도구. 그게 아이가 생각하는 반지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도 같아.


사람은 누구나 다르고 그래서 생각도 다르잖아. 그렇다면 반지에 대한 생각도 누구나 다르겠지. 전화기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 나는 다른 정의가 있다고 생각조차 안 해본 것들에 대해 아이는 자기만의 정의를 갖고 있었던 거야. 반지란 무엇인가. 전화기란 무엇인가.


그것 말고도 아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정의를 내리는 것들이 많겠지. 지금까지도 많았겠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점점 더 많아질 테고. 작게는 반지에 대한 정의부터 크게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까지.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해서도 아이는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를 갖고 자기만의 정의를 내리겠지. 그것이 아이의 고유한 특성이 되겠고.


양말도 그래. 아이에게 양말은 뒤집어 벗어 놓는 게 당연한 거야. 나는 뒤집어진 채로 그대로 빨고, 뒤집어진 채로 그대로 둬. 그러면 아이가 다시 신을 때에서야 제대로 뒤집어 신어. 처음엔 잔소리도 했어. 하지만 그러다 포기했지. 아이는 학교에 가기 전에, 외출하기 전에, 양말을 뒤집어 신으며 어쩌면 그날을 잘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는지도 모르잖아? 그날의 계획에 대해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한다던가, 마음을 다잡는 명상의 시간일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면 내가 아이에게 양말을 제대로 벗어 놓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이만의 명상 시간을 빼앗는 일일지도 몰라. 그러니 양말에 대한 아이의 정의 역시 존중하고 내버려 두는 거지. 그게 아이에게 양말인 거야. 아이는 결국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출근 전에 양말을 뒤집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을 갖게 되겠지. 그 사이 자기만의 정의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 사이 같이 살게 될 누군가가 결사적으로 양말을 제대로 벗어놓게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야. 


웃기지. 이게 다 무슨 궤변인가 싶지? 알아. 하지만 같이 살다 보면 묘하게 설득된다니까? 그리고 그렇게 설득 당해주는 게 어쩌면 가정의 평화일지도 몰라. 인간관계의 정수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인생은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 내가 내리는 정의들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정의를 내린다는 건 결국 내가 사는 세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살기 편한 대로 조금씩 만들어가는 과정 아닐까. 물론 양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학습해 주는 엄마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엄마라면 치열하게 싸우겠지. 그렇게 싸우다가 가족만의 정의가 내려지기도 할 테고. 다른 가족과는 다른 우리 가족만의 생활 방식 같은 게 생기겠지. 가족 안에서만 용인되는 우리 가족만의 고유한 특성 같은 게 말이야. 


그렇다면 거실 테이블이란 무엇일까? 우리 집 거실 테이블은 옷장이야. 마른 빨래를 개켜 거실 테이블 위에 놓으면 각자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시스템인데, 바쁠 때는 며칠 동안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아. 나도 해주지 않지. 그렇다면 사람들은 씻고 나와서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기 전에, 저녁에 샤워하러 가기 전에 거실 테이블 위에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 한꺼번에 가져가서 정리하는 법은 절대 없어. 수북한 속옷 더미에서 그날 입을 팬티 하나만 쏙 집어 가는 거지. 얼마나 얄미운지.


그래서 우리 집 거실 테이블은 빨래 정리대라는 정의가 성립되어 버린 거야. 물론 나는 마음에 안 들지만 가족들은 이미 그렇게 사용하고 있어. 나는 매번 잔소리를 하던가 다수결이 받아들인 정의를 나 역시 받아들이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거고. 당연히 나는 두 사람의 정의를 수용했어. 그래서 우리 집 거실 테이블에는 예쁜 화병이나 킨포크 같은 커피 테이블 잡지는 없어. 그냥 오늘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과 입고 나갈 티셔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이지. 웃기지. 우리 집은 그래. 당신네 집은 어때? 오직 당신네 집에서만 통용되는 새로운 정의가 있어?


결국 무엇을 정의한다는 건 내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 같아. 내 삶을 내 식대로 살아가기 위한 지표나 지침 같은 것. 그렇게 정의를 내림으로써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그 생각에 맞게 살아가는 거지. 그게 반지에 대한 정의든 결혼에 대한 정의든,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나에게 맞는 나다운 정의를 새로 내리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자기 삶의 현상들에 대해 자기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 같아. 남들이 정해놓은 대로 휩쓸려 가지 않고 내 방식대로, 내 속도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 가는 거지. 


아이는 나중에 자라 결혼에 대해서도 자기만의 정의를 내리겠지. 그 정의가 사회 통념과 반대되는 것일 수도 있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나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어른으로 키우려면 아이가 내리는 ‘반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지금부터 잘 수용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야. 점점 아찔한 속도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과거의 정의에 기대 살 필요는 없잖아. 누구나 남은 삶에 필요한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거야. 나에게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란 무엇인가. 나에게 돈 버는 일은, 집안일은, 아이를 돌보는 일은 무엇인가. 나에게 친구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냉장고란 무엇인가. 고양이란 무엇인가. 


물론 내가 내리는 정의가 함께 사는 다른 사람의 정의와 완전히 달라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그 차이가 나의 가치관을 뒤흔든다면 충분히 싸울 가치가 있겠고, 그게 아니라면 거실 테이블을 빨래 건조대로 사용하는 것쯤은 쿨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그렇게 내 삶을 새롭게 정의해 가면서 살아가는 거야. 내 생각을 표현할 언어, 내 생각을 정리한 문장들을 갖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 새로운 정의가 내 남은 인생을 새롭고 활기차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의지를 다지게 해주는 정의도 좋겠고. 다른 사람들이 내린 정의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게 바로 나만의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부분일 거야.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물론 조심해야 해. 그러다 새 반지를 계속 사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괜찮아. 반지란 원래 그런 거니까! 






사진: UnsplashEmil Kalibradov

매거진의 이전글 고딩들의 블루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