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의 허구
왜, 라고 묻지 말자
꿈을 꿨다.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중 “~ 때문에”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 때문에”를 지우고 “~이어서”로 바꿨다. 늘 그러듯이 무의식은 나에게 꿈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왜, 라고 묻지 마. ~이어서, 라고 해.” 꿈에 내게 준 교훈은 분명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고등학교 다닐 때 베스트셀러가 된 루이제 린저의 소설이다. 그때 나는 신간을 서핑하는 것으로 사춘기의 허한 마음을 눈요기하려고 종로서적을 자주 방문했다. 갈 때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 평대에 쌓아 올린 이 책과 눈 맞춤을 했다. 책 제목 자체가 주는 위로가 있었다. 나만 삶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구나. 유명한 작가도 고민하면서 살고 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소설을 쓸 이유가 없지. 삶은 나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왜 사니?” 나는 당황했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너를 만나려고.” 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이 말은 맞았다. 등굣길에 콩나물시루 버스 안에서 인간 콩나물 사이로 앞으로 밀치고 뒤로 쳐지면서도 묻곤 했다. “아, 성만아 왜 사니?” 대답은 간단했다. “학교 가려고.”
우리 반에는 세력을 과시하는 일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학급에서 폭군처럼 굴 때가 많았다. 누구 하나 건들지 않았다. 보다 못해 아니꼬워 내가 그 친구를 건들은 날이 있었다. 그는 상대도 안 되는 놈이 감히 자기에게 까분다며 학교 쓰레기장 뒤편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들은 말렸지만, 나는 깡다구로 싸우면 그 친구 하나쯤은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조직이 두려웠다. 두려움에 떠는 내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싸우러 가니?”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싸워야 하니까.” 나는 후한을 뒤로한 체 두려움 없이 기량을 발휘해 싸웠다. 이후 두려움 앞에서 “왜”라고 물으며 뒤로 후퇴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다독였다. “해야 하니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다
자신은 지독히 운이 없다는 사람이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내게 물었다. 그는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대답은 그에게 소용없고 해봐야 듣지도 않는다. 인생의 문제는 마치 과학처럼 “왜”로 풀리지 않는다. “왜”는 해결책이 아니다. 더 많은 “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성경에는 다윗이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지 묻지 않았다. 왜 군인도 아닌 내가 적장과 싸워야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워야 했다. 만일 다윗이 왜라고 물으며 고민했다면 골리앗의 선제공격에 당했을 거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다. 심리상담을 하면 꼭 부모 탓이 나온다. 그가 그런 것처럼 부모 역시 갈등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했기에, 부모 탓이라고 할만한 것은 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과 하와 때문이고, 결국은 다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 때문인 것은 다 천복이고 운명이다. 정말 그런가? 믿기지 않겠지만 자식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최선의 부모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온다고 한다. 모든 것의 원인은 나 때문이다. 내 인생도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인 것의 이유는 묻지 않는 거다.
사람은 왜 이유를 물을까? 좋은 결과에 대한 이유는 묻지 않거나 물어도 금방 잊는다. 잘못된 결과라고 하기에 그 이유를 묻고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 일이 고통스럽고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지금 여기서 일어난 모든 결과에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순간 마음은 둘로 분열된다. 그것들은 필연이고 통째로 나다. 인생을 인과론에 의한 결과로 생각한다면, 그는 불행을 안겨준 원인을 곱씹으며 더 불행해질 것이다. 인생에는 하나의 상태만 있다. 하나의 상태는 다음 상태로 이어가는 필연적 과정이다. 그러니 “~ 때문에”가 아니라 “~이어서”가 된다.
천국은 원인도 결과도 없어 지극히 평화로운 곳
싯다르타는 왜 인간이 고통받아야 하는지 깊이 명상했다. 깨닫고 보니 고통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었다. 본래 없는 것의 원인을 깨고 있으니 사람이 고통스럽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이란 말이 있다. 즉 물질적인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원인도 결과도 없이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바로 나이다. 우리는 지금 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영원의 한 점을 살고 있다. 너무 많은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나는 “내 탓이요”를 싫어한다. 그렇게 상습적으로 말하는 사람치고 자기 탓을 통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 탓으로 단정하는 순간 복잡한 문제들이 단순해지고 일순간 감정이 정화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잠시, 정화된 감정은 내 탓이 아닌 것을 내 탓으로 한 것의 분노로 다시 구정물이 된다. 어떤 상태도 사람이 혼자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상태에 대한 공동협력자이다. 우리가 공동으로 만든 작품에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반영됐다. 공동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을 내 탓이라 하는 것은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겸손한 척하는 교만이요 무지인 것이다.
뇌성마비인 아들을 둔 똑똑한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뇌성마비가 된 것은 임신 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녀에게 아들의 뇌성마비는 나쁜 결과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용하다는 기도원을 찾아다녔다. 아픈 아들을 안고 이 기도원 저 기도원을 다니는 희생을 하며, 아들을 병들게 한 자신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쁜 결과의 원인인 자신의 죄가 사라질 즈음에 아들에게 기적도 일어날 것을 믿었다. 그녀가 얻은 깨달음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랐다. 아들이 나쁜 결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천사로 보였다. 아들이 천사였다. 천사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온다. 판단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아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랄 필요도 없어졌다. 치료와 기적이 일어나야 할 대상인 아들이 사랑의 대상인 된 것이다.
천국은 생각이 멈춰 원인도 결과도 없는 지극히 평화로운 곳이다. 고대 이집트 사막에 은둔하던 수도승이 지향하는 마음 상태는 “지극한 고요와 평화”였다. 이 상태에서 영혼은 미혹 당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린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편입된 상태이다. 영원한 하나님 안에는 시간의 개념인 과거와 미래가 없듯이 원인과 결과도 없다. 모든 원인과 결과가 사라진 지극한 고요와 평화, 그곳을 떠나온 우리는 다시 그곳을 향해 순례의 길에 올랐다.
가나심리치료연구소 마음순례 박성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