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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 수목원

숲과 바다를 함께 즐기는 매력

by 본격감성허세남

1박 2일 동안의 짧은 여행 둘째 날.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태안의 <천리포 수목원>에 들르기로 했다. 두 돌이 지나 한참 고집을 부리고 있는 수인이와 함께 여행을 갈 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딱 2가지 정도다. 물놀이에 가거나, 자연을 보러 가거나. 물놀이는 어제 다녀왔으니 이제 남은 한 가지 옵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수목원이었다. 천리포 수목원의 명성은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다. 좋다더라, 보기 드문 곳이라더라 등등. 하지만 태안에 있어 접근성이 좋지 않기에 늘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충청도에 온 김에 드디어 가볼 수 있게 됐다. 우리가 묵었던 홍성에서 태안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동할 만한 거리다. 홍성의 숙소가 여러모로 참 좋네. 올 해가 다 가기 전에 다시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로운 곳에 처음 가볼 때마다 느끼는 설렘이 있다. 예전에 습관적으로 여행을 다닌 가장 큰 동기는 이 설렘이었다. 수인이와 함께 한 뒤로 그 점이 살짝 덜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설렘은 즐겁다. 마침 어제에 이어 날씨도 매우 화창하고 좋아서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차 문을 활짝 열고 바람을 맞으며 달릴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즐거움마저 이제는 쉽게 누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날이 더 소중하다. 우리 딸도 카시트에서 노래를 들으며 들썩들썩 신이 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계시는 전남 광양까지 차로 자주 다녀와서 그런지 다른 애들에 비해 수인이는 카시트에 정말 잘 앉아있는다. 우리가 잘 키운 건지, 아니면 여행 체질인 건지, 아무튼 덕분에 잘 다닐 수 있어서 좋다.


11시쯤 수목원에 도착. 주차장엔 이미 차들이 많았다. 주차를 하고, 유모차 및 다른 물건들을 준비하고,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걸으니 작은 연못이 나왔는데 그 주변의 녹음이 그야말로 눈부셨다. 연못가엔 노란 수선화가 수수하게 피어 있었고, 하늘엔 구름조차 없는 하늘 아래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거참, 수목원 구경하기 딱 좋은 날일세!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보고만 있어도 깨끗해지는 그런 느낌. 이 맛에 수목원에 온다.


사진 2017. 5. 28. 오후 12 39 18.jpg 우리가 수목원에 기대했던 바로 그 모습


녹색은 기분이 좋다. 우리가 하는 것이라곤 그냥 걸어 다니는 것뿐인데 그래도 좋다. 신기한 것이 늘 어딘가를 열심히 뛰어다니는 수인이도 녹색 앞에서는 비교적(?) 얌전해진다. 자연의 녹색은 아이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나 보다. 서울에서 자주 갔던 포천의 <국립 수목원>이 거대한 규모의 숲을 걷는 느낌이었다면 이 곳은 정원을 산책하는 느낌이랄까. 참 예쁜 곳이었다. 나와 아내는 걸어 다니면서 내내 "예쁘다."라는 말만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수인이도 이런저런 나무와 잎을 만져봤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수인이는 나뭇잎을 만지고는 금방 부끄러워하며 손을 뗀다. 입은 웃고 있다. 아마 신기한 것이겠지. 처음 보는 나무는 주저주저하면서도 결국엔 만져보고, 기억했다가 집에 가서 자연 전집에서 찾아보기도 한다. 그렇게 알게 된 식물이 소나무, 민들레, 장미 같은 것들이다. 아직 말은 못 하지만 우리 딸은 나름대로 자연을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그래서 이번에도 마음껏 만져보게 했다. 아쉽게도 여기 있는 나무들은 우리 집에 있는 자연 전집에 없다. 얼마나 기억할지. 다 잊어도 이 느낌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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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 수목원은 바다 옆에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바다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코스 역시 그렇게 짜져 있다. 입구로 들어가서 나무를 실컷 보며 산책을 하고 빙 돌아서 나오면 바다로 연결된다. 녹색의 세상을 실컷 맛보고 지나오면 나면 푸른 바다가 우리를 맞아준다. 참 눈이 호강하는 곳이다. 비록 바다에 가까이 가지는 않았지만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가. 그런 것이 바다의 매력인 것 같다.


수인이는 바다에 훨씬 더 관심을 보였다. 바다에 가고 싶은지 우리 콩순이(애니메이션 주인공과 머리 스타일도, 하는 짓도 비슷해서 자주 콩순이라 부른다)는 그 앞에 매달려서 아무리 가자고 해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긴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그 느낌이 나도 참 좋더라. 호기심 많은 아이는 오죽했을까. "어, 어" 하며 감탄만 지르던 우리 딸. 말을 했으면 아마도 이런저런 말을 조잘조잘하지는 않았을까.


"아빠, 이게 바다죠? 엄청 커요."

"저기 섬에 갈 수 없어요? 가보고 싶다."

"아빠 우리 바다에 가요. 수목원 말고 바다 바다."


귀찮아도 좋으니 얼른 말 좀 하렴. 세 돌이 지날 때까지 안 할래. 어휴. 아빠 엄마는 빨리 너와 이런저런 말을 나누고 싶단다.


사진 2017. 5. 28. 오후 12 27 41.jpg 바다가 궁금한 콩 콩 콩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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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서울로 가는 길에 점심이라도 사 먹고 가려고 했는데 수인이가 자는 바람에 곧장 서울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잠깐 편의점에 들러서 주전부리를 사 먹기는 했다. 그때도 수인이는 쿨쿨 잠을 잘 잤다. 덕분에 뒷자리에서 엄마도 잘 자고, 아빠는 운전을 했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잘 자는데 운전쯤이야.


큰 기대 없이 떠났던 충청도 여행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의외로 굉장히 좋았다. 해외여행은 늘 생각하고 있는데 국내 여행의 매력은 어느새 잊고 있었나 보다. 작년 가을에 영월에 다녀온 뒤로 국내 여행은 처음이다. 마음은 편안하고, 날씨는 화창하고, 수인이도 좀 더 활기차고, 이렇게 좋은데 왜 늘 뒷전이었을까. 국내든 해외든 여행은 즐거우면 그만이다. 일상에서 떠난다는 것이 중요하고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장소가 무슨 소용이랴. 이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었나 보다. 하루하루가 왠지 지겹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새로 하게 됐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오소희 씨의 아프리카 여행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사람 역시 인터뷰를 하면 자주 듣는 질문이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지 않느냐."라고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태도예요. 자신을 열어야 할 순간에 열어버리는 것, 그래 보는 것, 그럼으로써 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요. 오늘 머문 이곳의 지명과 이곳에 있던 아름다운 성곽 따위는 잊어도 좋아요. 그러나 오늘 열어본 경험은 '태도'가 되어 퇴적층처럼 정직하게 쌓일 겁니다. (중략) 저는 생명으로 자식을 이 세상에 데려왔으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저렇게 거창하지는 않지만 내가 어린 딸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이유도 비슷하다. 늘 시간을 보내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기를,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을 직접 볼 수 있기를, 설사 그것들을 하나도 기억 못 하더라도(당연히 못 하겠지) 어딘가에 쌓여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이번 여행 역시 즐거운 물놀이와 눈부신 녹음으로 희미하게나마 우리 딸의 마음속 어딘가에 남았으면 좋겠다.


수인이 떼가 많이 늘면서 피곤한 일도 많아지고, 그러면서 예전만큼 많이 놀러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느꼈다. 떼가 늘면 받아주면 되는 거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해서 어딘가를 다니는 것이 나와 아내와 수인이 모두에게 더 즐거운 경험이라는 것을. 성인이 함께 가도 의견 다툼은 있는 법. 다만 우리 딸은 말을 못하기에 고집을 부려서라도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화로 잘 풀어봐야지. 계속해서 열심히 놀러 다니자꾸나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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