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주말에 수인이와 함께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본격적인 여름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에 한 번 더 가볍게 놀러를 다녀오기로 했다. 짧은 육아 휴직에서 곧 복귀하는 아내에게 선물하는 마지막 여행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출근을 하게 되면 이전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기 힘들게 되게 마련이다. 지금은 나 혼자만 조정하면 되지만 이후부터는 둘이 함께 조정을 해야 하니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해외가 아니더라도 복직 전에 마지막으로 놀러 다녀오자."
"그래. 어디 갈까? 물놀이가 좋겠지?"
"응. 그치만 차 막히는 건 싫으니 그럼 하루만 휴가 써서 물놀이도 하고, 주변도 보고 하자."
그렇게 해서 평창으로 가게 됐다. 출발은 금요일, 돌아오는 날은 토요일. 숙소는 평창 휘닉스파크로 잡고 물놀이를 하고 그 안에서 푹 쉰 후에 둘째 날에 대관령의 여러 목장들 중 하나에 들러 산책을 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마침 휘닉스파크에 숙소와 워터파크, 케이블카까지 포함된 패키지가 굉장히 저렴하게 나와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충청도로 가벼운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여행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다.
휘닉스 평창의 워터파크인 <블루 캐니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아직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 게다가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매우 없어서 수인이와 함께 안전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었고, 물도 지금까지 갔던 국내의 그 어떤 워터파크보다도 좋았다. 게다가 산 속이라 공기도 쾌적한 느낌이었다. 수인이는 이제 물을 완전히 좋아한다. 집에서도 물놀이라는 말이 나오면 방에 들어가서 수영복이 들어있는 가방을 가지고 나올 정도다. 처음에 일산에 있는 유아용 수영장 <베이비 엔젤스>에 갔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는 이 큰 워터파크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미끄럼틀을 타는 것을 보니 뿌듯했다. 세월이 참 빠르다고 하지만 아이는 그 세월보다 더 빠르게 큰다. 언제 이렇게 컸니. 놀랍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살짝 복잡한 감정이다. 어릴 때는 빨리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조금만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
그렇게 2~3시간 동안 워터파크를 즐긴 후 나와서 한가롭게 리조트를 구경했다. 패키지에 포함된 케이블카를 즐길까 하고 가봤지만 예상보다 빨리 매표소를 마감하기에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케이블카는 다음날로 미루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때 어떻게든 케이블카를 탔어야 했다. 하지만 앞날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부질없는 후회일 뿐. 기왕에 그렇게 된 거 산책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스키/스노보드 라이더들로 붐비지 않는 여름의 리조트는 의외로 상당히 좋았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패키지를 이용해서 가볍게 한 번씩 다녀와야겠다.
물놀이의 좋은 점은 힘을 다 뺀 우리 딸이 금방 잠에 든다는 점이다. 유모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수인이는 이번에도 금방 잠에 들었다. 이때다 싶어 우리 부부는 근처 카페로 옮겨 커피를 한 잔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 정말 평화롭고 좋다."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은 즐겁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낮잠을 잘 때 생기는 이런 휴식 시간이야말로 아빠 엄마에게 정말 소중하다. 너무 많이 자면 밤에 또 잠을 늦게 자기에 보통 1시간 정도만 재우곤 하는데 누군가에겐 짧기만 한 1시간이라는 시간이 아빠와 엄마에게는 정말 긴 시간이 된다. 사람은 부족해야 소중함을 안다고 하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시간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무튼 수인이는 잘 놀고 잘 잤다. 건강하게 크면서 잘 자는 것, 이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딸은 정말 효녀다. 효녀 심청이 따로 없을 정도다.
수인이가 깬 후에는 밖에 나가 저녁거리를 사 온 후 숙소에서 여유롭게 해 먹었다. 주 메뉴는 평창 한우. 한우가 유명하다니 한우를 먹어줘야지. 비록 작은 콘도지만 부족함 없이 다 갖춰져 있어 쾌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이제 여행을 가서도 식당에 가서 사 먹기보다는 직접 해 먹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국내외 어디를 가든 숙소를 찾을 때부터 아예 주방이 갖춰져 있는 숙소를 우선적으로 찾게 된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바뀌게 된 또 하나의 모습이자 새로운 재미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자기 전까지도 수인이는 잘 놀았다. 1층 로비 바닥에 스크린이 있어서 아이들이 밟으면 바뀌도록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상당히 재미있게 놀았다. 수인이는 역시 물고기를 좋아했다. 물고기가 아닐 때는 대체 물고기가 언제 나오는지 턱을 괴고 진지하게 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이후에 잠깐 태워줬던 엠버 놀이기구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잠시 떼를 쓰긴 했지만 정말 착하게 보낸 저녁이었다. 첫날까지는 이렇게 완벽했는데.
이윽고 둘째 날.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체크아웃을 한 후 떠나기 전에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곤돌라였는데 높이 올라가는 것이 신기한지 수인이는 내내 감탄을 했다. 이때까지는 참 좋았다. 문제는 내릴 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정상에 도착해서 곤돌라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수인이는 울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달래서 내리긴 했다. 계속 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려서 아빠 엄마와 함께 달리기도 하고, 수인이가 좋아하는 분수도 보고, 여름을 맞아 설치된 바람개비를 만져보기도 하면서 우리 딸은 조금은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정상에 있는 양들이었다. 처음으로 양을 보여주겠다고 데리고 갔는데 그 양이 무서웠던지 그때부터 수인이는 울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양에게서 떨어진 이후에도 그랬다. 심지어 포기한 채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그랬다. 아까는 내리기 싫어하더니 이제는 얼른 내리고 싶어 했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수인이는 아직 말을 못 한다. 말이 좀 많이 늦다. 말을 하면 기똥차게 알아듣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무시하기도 하고 그러기에 큰 걱정은 안 되는데 대신 답답하다. 이럴 때도 말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아빠 엄마가 아이와 잘 통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답이 없을 때도 있다. 이 날은 갑자기 왜 그랬을까? 정말 양이 무서워서 그랬던 걸까? 여전히 미스터리다.
결국 내려와서도 모든 계획은 다 취소하고 서울로 복귀했다. 울음은 그쳤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대관령 목장에 간다는 건 무리다. 춘천에 들러 막국수를 먹는 것은 더더욱 무리다. 대신 빠르게 집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덕분에 차는 덜 막혀서 좋다고 해야 하나. 중간 정도 갔을 때부터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평창 주변의 도로는 내년에 있을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 뜯겨 있어 누더기인 상태다. 어제 올 때는 이런 상황도 크게 개의치 않았었는데, 우울하게 복귀하다 보니 도로 상태 역시 짜증이 났다.
둘째 날 남은 건 잠시나마 진정이 됐을 때 찍은 아래 가족사진 한 장뿐. 완벽했던 첫째 날과 완전히 달랐던 둘째 날. 이번 평창 여행은 반쪽짜리 여행이 되어 버렸다. 여행은 언제라도 또 갈 수 있기에 의연하게 받아들이자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남는 아쉬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휴,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역시 점점 더 어려워진다. 10개월 때 떠났던 독일이 가장 쉬웠다고 하는 아이러니.
그래도 또 다음 여행을 꿈꾸리라. 수인이가 말을 하면 좀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