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잊을 수 없는 야경

큐슈와 혼슈를 넘나들다

by 본격감성허세남

설을 맞아 떠난 일본 여행의 사실상 마지막 날. 날씨가 매우 좋아졌다. 첫날엔 날씨가 좋았다가 2~3일 차에는 흐리고 가끔 비도 왔는데 4일 차가 되니 그 어느 때보다 쾌청하고 따뜻해졌다. 한국보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딱 큐슈의 겨울 같은 느낌이랄까. 덕분에 숙소를 나올 때부터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오늘은 큐슈의 북쪽 끝인 기타큐슈에 가기로 했다. 큐슈섬과 혼슈섬의 경계가 되는 곳. 후쿠오카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을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큰 생각 없이 끝에 한번 가보자 하고 가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다.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날의 일정은 고쿠라 성에서부터 시작했다. 구마모토 성에 가려다가 지진 때문에 복구 중이라고 해서 급하게 결정한 곳인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일본스러운 맛도 있고 산책하며 돌아보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화창한 날씨에 딱 어울리는 곳이랄까. 햇빛을 받아 하얀 성벽이 눈부셨다. 날씨가 열일한다.


하늘과 해자와 성이 멋지게 어우러진 고쿠라 성


우리 딸은 뭐 이렇게 신났을까? 이날 수인이는 일본에 온 후 가장 활발했다. 집만 나오면 신나는 아기.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역시나 자판기가 나오니 자판기에 한참 매달리다가, 또다시 뛰어다녔다. 늘 유모차를 타고 다니다가 군데군데만 걸어 다녔던 지난날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처음으로 유모차 없이 도전한 여행인데 수인이가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다녀서 다행이다. 아이는 정말 쑥쑥 자란다.


전날 3천 년 된 녹나무를 보고 "나무 하찌찌"하던 수인이는 이번엔 "성 하찌찌" 하며 돌아다녔다. 하찌찌는 할아버지인데 왜 굳이 나무와 성에만 할아버지라는 말을 붙였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 아빠 엄마는 모를 수밖에 없다.


"수인아 성 하찌찌가 뭐 줬어?"

"돌."


하며 돌을 던지는 우리 딸. 정말 아이들에게만 보이는 성 할아버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날씨고 좋고, 뛰어놀기도 좋고, 멋진 토요일이다. 성 근처에 굉장히 좋아 보이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는데 거기 갔으면 아마 수인이라면 오후 내내 놀았을 듯. 눈치채지 못하도록 빠르게 지나쳐갈 수밖에 없었다.


사진 2018. 2. 17. 오전 11 29 06.jpg
사진 2018. 2. 17. 오전 11 55 47.jpg
사진 2018. 2. 17. 오전 11 45 29.jpg "너무너무 신나요!"


전부터 일본에 오면 꼭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이 '야끼 카레'다. 어디선가 우연히 알게 된 후에 혹시 한국에는 파는 곳이 없나 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기도 했었는데. 마침 일본 야끼 카레의 본산지가 기타큐슈에 있기에 점심을 야끼 카레로 먹었다. 같은 기타큐슈지만 고쿠라 성에서 야끼 카레를 먹을 수 있는 모지코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고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결국 시모노세키까지 다녀왔다. 시모노세키는 혼슈, 기타큐슈는 큐슈. 섬이 달라지는터라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다리 통행료가 또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돈이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큐슈와 혼슈를 잇는 다리와 해저터널을 모두 경험했으니, 이것이 전화위복인지 모르겠다고 좋게 생각했다.


그렇게 힘들게 와서 먹은 야끼 카레는 기대를 충족시킬 정도로 맛있었다. 정통 일본 카레에 치즈가 더해져 오븐에 구운 카레는 일반 카레와는 다른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모지코에 야끼 카레 음식점들이 정말 많은데 각기 다른 매력들이 있다니 언젠가 몇 곳 더 도전해보고 싶다. 아... 사진 보니 다시 먹고 싶다.


사진 2018. 2. 17. 오후 1 21 57.jpg
사진 2018. 2. 17. 오후 1 21 51.jpg
사진 2018. 2. 17. 오후 1 48 50.jpg
사진 2018. 2. 17. 오후 1 47 11.jpg


모지코는 '레트로' 느낌으로 유명한 모양이었지만 바람도 너무 많이 불고 결정적으로 주차비도 너무 비싸기에 얼른 떠나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큐슈에서 나와 혼슈로! 원래는 수산시장에 들러서 초밥을 사 먹어볼까 했지만 생각보다 금방 문을 닫아서 포기하고 목적지를 전망대로 변경. 이날의 핵심은 이때부터였다.


히노야마(Hinoyama) 공원이라고 차로만 갈 수 있는 전망대였는데 주차장이 심지어 무료였다. 그런데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거의 없어서 처음엔 괜히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은 조금만 올라가니 금방 사라졌다. 혼슈와 큐슈를 아우르는 엄청난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게다가 완벽한 날씨까지 더해지니 말 그대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정상에서 한참을 있었다. 비록 자판기지만 커피도 뽑아서 한 잔 하고,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고. 사람이 없는 것이 신기했던 곳. 아예 야경까지 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원래 계획했던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시모노세키에 간다면 꼭 한 번 가보라고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그런 곳이다.


사진 2018. 2. 17. 오후 3 10 27.jpg
사진 2018. 2. 17. 오후 3 30 01.jpg
히노야마 공원에서 바라본 시원한 전망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이자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던 사라쿠라산 전망대. 기타큐슈에서 후쿠오카로 돌아가는 길에 있고, 야경이 유명한 곳이기에 딱 들르기 좋은 곳이라 기타큐슈에 가기로 했을 때부터 계획으로 잡아놨던 곳이다. 전망대까지 산악열차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가는데 평일에는 그 열차를 빨리 종료하기 때문에 야경을 보기가 힘들도 주말에만 늦게까지 하기에 주말 아니면 의미가 없는 곳. 마침 이날이 토요일이라 우리 계획과도 딱 맞았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신 일본 3대 야경' 어쩌고 쓰여있는 포스터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어디서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도 야경으로 유명한 곳인가 보다. 1차로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고, 2차로 전망을 볼 수 있는 열차로 갈아타서 올라간다. 그 과정도 참 멋져서 올라가는 동안 기대가 한껏 커졌다.


사진 2018. 2. 17. 오후 4 51 45.jpg 전망대로 올라가는 그 과정도 참 멋졌다.


정상의 풍경은 기가 막혔다. 그 말로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 고층 건물이 굉장히 많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360도로 확 트인 전망이 너무나도 멋졌다. 시원하다 라는 말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런 곳이었다.


사진 2018. 2. 17. 오후 5 06 38.jpg
사진 2018. 2. 17. 오후 5 27 22.jpg


아무리 날씨가 좋은 날이라지만 아직은 겨울이고 게다가 전망대는 산이다 보니 오후가 되니 쌀쌀해졌다. 실내 전망대로 들어가서 팝콘을 먹으며 기다렸다. 전망대에 오른 시각이 5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하루 중 빛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래서 '골든아워'라고 한다는 해지기 직전을 보고자 그때부터 여유롭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노을이 지고, 낮에 본 풍경에 불이 하나둘씩 켜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니 금방 깜깜해진 우리 앞에 환상적인 야경이 펼쳐졌다. 홍콩처럼 화려한 야경은 아니지만 여유 있고 시원하달까. 그러면서 조금은 따뜻한 느낌이랄까. 높은 곳에 올라가서 주변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해서 세계 어딜 가나 높은 곳엔 곧잘 올라가는 편이다. 그래서 수많은 야경들을 봤지만 이곳의 야경은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야경을 보러 올라가기까지의 과정과 전망대 정상의 주변 느낌부터 좋았고, 운하와 불빛이 어우러진 야경은 정말 멋졌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야외로 나갔다가, 실내에 들어와서 잠시 추위를 녹였다가, 내려가는 길에 산악열차를 기다리며 또 보다가 해도 질리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듯. 그렇게 이번 여행은 끝이 났다. 마무리에 딱 어울리는 그런 곳이 아니었나 싶다.


사진 2018. 2. 17. 오후 6 00 26.jpg
사진 2018. 2. 17. 오후 6 10 45.jpg
절대 잊지 못할 환상적인 야경


완벽한 마무리였다. 정상에서 우리 엄마 아빠는 환하게 미소 지으셨다. 부디 이 미소 오랫동안 지어주시기를. 내가 조금 더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님의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든다. 어릴 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30대가 지나고 딸도 생기고 하다 보니 이제는 점점 실감이 난다. 그럴수록 이런 시간이 참 소중하다.


명절에 놀러 가니 참 좋네. 효도 여행이 힘들다고 하지만 처음이 힘들지 몇 번 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 가야겠다. 지금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더 큰 수인이와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도 생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항상 새로우니까 이것 역시 색다른 장점이다.


돌아와서 우리의 사진을 동영상으로 만들었는데 수인이는 그 동영상을 보며 "어머임 아뵈빔(어머님, 아버님)", "욘기", "일본", "성 하찌찌"하며 즐거워했다. 아내가 우리 엄마 아빠를 부를 때 쓰는 어머님/아버님이라는 말을 따라 하는 것도 웃기고, 이제는 기억을 잘 하는 것도 재미있다. 많이 컸다. 기특하다. 그리고 뿌듯하다. 어느새 이만큼이나 많이 컸구나.


사라쿠라산 전망대에서 엄마, 아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