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설레요.
싱가포르 오피스에 출장을 와 지내던 한국인 동료가 물었다. "저는 딱 3개월 있다 가니까 돌아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Alicia는 여기 계속 사니까 어때요? 여행 같나요 일상 같나요?"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이 설레요.
첫마디였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풍경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 아직도 설렌다.
내가 싱가포르에 있구나. 출근길에 집을 나오자마자 만나는 뜨거운 태양, 새파란 하늘과 도로 주변에 우거진 푸른 나무들을 보면 강렬한 생명력을 느낀다. 하루를 여행지에서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며 얻는 귀한 에너지가 아닐까.
싱가포르에서 여행과 출장이 아닌 일상을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나고, 나에게 싱가포르가 어떤 나라인지 되돌아 봤다.
싱가포르는 여름을 사랑하는 나에게 태양 에너지가 넘치는 나라다. 교환학기 국가를 고를 때도 캐나다와 영국은 날씨(겨울과 비) 때문에 제외했다. 그렇게 날씨 덕분에 처음 호주와 싱가포르를 만났다.
내가 속한 자연 환경을 사랑한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환경을 바꾼다는 건 종종 불가능하고, 종종 너무 과도하게 그 사람의 인생을 모조리 투자해야 하는 강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내가 처한 환경을 사랑하고, 그 환경 속에서 내가 가진 강점을 극대화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한 생애를 사는 인간에게 축복이다.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고민을 접자 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해 사유할 시간과 에너지가 늘어난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만족스러운 이 환경 속에서 나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이 특별한 환경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2주간 호텔 격리를 하며 저녁 8시, Channel News Asia 저녁 뉴스 시간을 기다렸다. 놀랍게도 여러 번 한국 뉴스가 첫 번째로 보도되고 (코로나 대응, 삼성 재판 등), 중국, 미국, 일본의 소식을 지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까지 아시아 정세가 매일 공유된다. 정작 싱가포르 소식은 많지 않다. 새삼 싱가포르가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 주변국의 정세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빠르게 대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나라인지 실감한다.
Let curiosity be your compass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으니 싱가포르의 저녁 뉴스는 그 어떤 콘텐츠보다 재미있다. 호랑이를 좋아해 호랑이 굴에 살고 있다.
이곳에서 회사의 동료들은 싱가포르인, 한국인, 대만인, 베트남인, 중국인까지 다채로워진다. 각국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대화 소재가 된다. 회사의 클라이언트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중국, 홍콩, 호주까지 더 다양하다. 매일 이들과 대화하고, 매주 성장과 변화를 논의하며, 오늘도 현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고, 호기심을 해소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경험과 커리어는 깊고 다채로워진다. 오늘도 내 안에 쌓여간다.
졸업 직전 심리학 수업에서 인생 그래프를 그리며 자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인생 그래프의 피크는 학창 시절 성적도, 가족의 경사도, 대학 입학도, 첫 연애도, 첫 독립도 아닌 '호주에서 처음 외국 문화를 경험했을 때'구나. 그리고 1년 동안 호주에서 살아가며 인생 그래프는 꺾이지 않았다. 두 번째 피크는 늦깎이 복학생 시절, '계절 학기 수업에서 오랜만에 싱가포르 교환 학생들을 만나 친구가 됐을 때'구나. 나는 '문화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가장 크게 반응하는 사람이구나.
내 인생 가치를 깨닫자 나는 한국에서 살 수 없었다. 문화 다양성이 중요한 사람이고, 다양성이 한국보다 넘쳐흐르는 세상을 알아버렸는데, 개인이 살아갈 국가를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시대인데, 한 생애를 한 문화권에서만 살 수 없어 끊임없이 싱가포르 문을 두드렸다.
싱가포르는 총인구 570만 명 중 자국민이 60%(350만), 영주권자가 10%(53만), 외국인 비중이 30%(168만)에 이르는 개방적인 다문화 국가다. 외국인의 인종은 말할 것도 없이 자국민 자체도 중국인, 말레이, 인도인, 유라시안까지 다인종으로 구성된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싱가포르의 풍경은 나에게 생동감 넘치는 자극이다.
그렇게 다양성을 찾아 떠나온 이 곳에서 나 또한 다양한 삶의 한 축을 담당한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호주로 교환학생을 갔다가, 글로벌 마케팅 일을 하며 동남아시아 출장을 자주 다니다, 테크 섹터로 이직해 싱가포르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 Expat. 싱가포르인들의 눈에는 새로운 유형이다. 그래서 받는 질문은 항상 "왜 싱가포르야?" 나는 한국에 있다면 받지 않게 될 이 질문이 참 좋다. "싱가포르가 왜 좋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이유를 자주 설명하며 행복해진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스스로 무엇을 '정말' 좋아하는지도 시도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은 참 많은데 시간과 삶의 제약 속에서 직접 시도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다.
싱가포르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모아간다.
아무도 없다
나를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도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내가 지금 가야만 하는 곳도
지금 있어야만 하는 곳도
나를 지탱해주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운동 - 싱가포르 오피스의 동료들과 매주 수요일마다 퇴근 후 3km 러닝을 하기 시작했고, 콘도 야외 수영장에서 주말마다 수영을 배우고, 요가를 매일 가기 시작했고,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친구의 친구들이 코치가 되어 우리만의 테니스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일 - 동남아시아와 중국 클라이언트의 퍼포먼스를 개선해 오피스의 분기 매출을 2배로 성장시켰고, 신규 채용을 이끌어 팀 규모를 키우고, 오피스에 복지 제도와 팀 활동을 도입하고, 인생 멘토를 만났다.
일상 - 다양한 크래프트 맥주와 와인, 커피와 차를 공부하며 마시고, 싱가포르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설날을 싱가포르 친구의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싱가포르 친구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며 로컬의 삶을 경험하고, 틈만 나면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가고, Expat 하우스메이트들과 외국인으로서의 일상과 도전을 공유하고, 싱가포르 구석구석 공원과 섬으로 트래킹을 다녔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초록 자연, 여름 날씨, 야외 운동, 동남아 시장, 글로벌 비즈니스, 문화 다양성, 소중한 사람들)을 주변에 자주 모으고, 찾아가고, 시도하며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얻었다. 그렇게 경험하고 나서도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는 정말 원초적으로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확신을 갖는다.
3년 전에 쓴 이 글은 아직도 유효하다.
싱가포르에서 나는 행복하고, 그 사실을 알고 있다.
1년이 다가오겠지. 천천히 가도 괜찮다. 태양 에너지를 느끼며, 호기심을 따라, 다양성을 경험하며, 좋아하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종종 두 살만 어려서 싱가포르에 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욕심 어린 생각이 들고, 애써 생각한다. 싱가포르에 좋은 조건으로 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며 이만큼 경험하지 않았다면, 삶에서 시간이라는 자원이 이만큼 소중해지지 않았다면, 이만큼 건강하게 옳은 방향으로 우직히 걸어가지 못할 거야.
짐을 챙기며 그동안 한국과 외국의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를 일부 챙겼다. 혹 싱가포르에서 외롭거나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을 때 친구들의 목소리로 다시 힘을 내기 위해서.
넌 정말 신기한 애야.
언제 어디 있어도 있는 그대로의 너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즐겁고 신기한 일들을 찾아내는,
그래서 같이 있으면 덩달아 행복해지는 멋진 사람이야
다행히 서랍 속 엽서들을 아직 다시 찾지 않았다. 나로서 싱가포르에서 오롯이 살고 있기에, 비슷한 목소리를 일상에서 더 자주 듣고 있기에.
우리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을 거야.
앞으로 써나갈 내용들이 정말 기대되지 않아?
나의 책 속 싱가포르라는 챕터와 그 안에 등장하는 소중한 사람들, 다채로운 순간들.
나는 아직 싱가포르에서의 오늘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