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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보영 Dec 09. 2020

내 방에서 살아남기

내 방에 물건 두고 가지 마 (릿터 발표)

             내 방에서 살아남기 

                -내 방에 물건 두고 가지 마- (릿터 발표)


 방은 다음과 같이 생겼다.        

       

“안녕히 주무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어렸을 때 오빠와 나는 자기 전에 부모님께 이렇게 인사했다. 어딜.. 다녀온다는 말이었을까. 당시 오빠와 나의 세계에서 잠은 일종의 출근이었나. 우리에게 잠은 휴식보다 유희의 기능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일어날 때 졸린 이유가 꿈속에서 너무 놀아서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잠은 점점 유희의 기능을 잃고 휴식의 기능에 집중한다. 잠은 삶에서의 (일시적인) 퇴근과 같기 때문에. 그러나 스무 살 이후 사라지지 않는 불면증 때문에 나에게 잠은, 출근도 못하고, 퇴근도 못한 채 꽉 막힌 도로에 끼인 상태에 가깝다.

     

새벽 2시 28분. 잠이 오지 않는다. 잠들기에 실패한 나는 ③번에서 ②번으로 이동해 공책을 펴 일기를 쓰고 있다. 내 방을 되찾는 내용의 일기이다. 저녁 7시경, 나는 방에서 쫓겨났다가 9시가 돼서야 방을 되찾았다. 내가 방에서 쫓겨나는 순간은 친구가 내 방에서 잘 때이다. 친구가 놀러 오면 친구는 침대에 앉고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눈다. 내 방에 자주 놀러 오는 사람은 인력거(친구의 이름이다)인데, 그녀는 방에 들어오면서 동시에 양말을 벗는다. ⑨번에서 ⑧번으로 걸어가는 길목에 양말을 한 짝씩 벗어놓는데, 한 짝은 문가에 벗어놓고 다른 한 짝은 그로부터 약 20cm 떨어진 지점에 벗는다. 양말을 벗는 개인적인 방법이 있는지, 벗겨진 양말은 희한하게도 동그랗게 말린 작은 원통형이다. 발이 빠져나가고 생긴 둥근 공간 때문에, 흡사 지붕에서 새는 물을 받기 위해 바닥에 세워둔 작은 그릇 같다.


참고 자료 (비 받이 깡통)               


인력거는 약간 뻣뻣한 자세로 침대 모서리 ⑦번에 앉아 있다가, 조금씩 영역을 넓혀 ⑧번으로 슬금슬금 이동한다. 이내 답답하다며 바지를 벗고 내복 차림으로 갈아입더니 은근슬쩍 뒤로 눕는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인력거는 어느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두 눈만 내놓은 채, 내게 말한다. ‘불 좀...’     


나는 불을 끄러 방의 중앙 ①로 이동했다. 그리고 ⑪으로 물러나 ‘잘 거야?’하고 다시 묻는다. 이제 나는 ⑨로 물러난다. 스위치가 코앞이다. 점점 후퇴하다가 문 앞에 다다른다. 그렇게 나는 내 방에서 영영 물러난다. 역시 방은 물러남을 경험하는 공간인가. 그런데 방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친구들이 내 방에 자기 물건을 너무 많이 두고 간다는 점이다.      


인력거가 놔두고 간 일기장, 미성이가 두고 간 타이레놀, 해솔이가 두고 간 양말, 규희가 두고 간 바람막이, 우기가 놔두고 간 텀블러, 지혜가 놔두고 간 모자... 나만의 것으로 가득했던 방이 타인의 흔적으로 흐트러지고, 친구들의 물건과 내 물건이 뒤섞이면서, 내 방은 약간 내 방이 아니게 된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내 방을 자기 방으로 만드려는 속셈인가. 그러나 친구들은 자신이 두고 간 물건에 대한 미련이 없고, 나도 물건을 책임지고 돌려주는 성격이 아니어서, 두고 간 물건은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되고....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나는 문득, 친구 귀고리를 걸고, 친구 옷을 입고, 친구 양말을 신고 있는 나에 관한 존재론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친구 인력거인가, 해솔이인가, 아니면 나는 해솔이면서 규희이고 우기이면서 동시에 미성이인가. 그렇게 나는 여러 명의 사람이 되어간다.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일기장은 인력거가 두고 간 일기장에 이어서 쓰는 일기로, 나에게 일기란 늘 친구와 관련된 어떤 것이었다. 처음 일기 혹은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문학회 동아리 회원이었다. 친구들은 블로그에 시를 올렸다. 나는 친구들의 시를 먹고 자랐다. 그런데 친구들의 시를 공짜로 읽는 게 미안해서 나도 뭐라도 내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블로그를 열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는 친구들의 시를 읽기 위해 지불하는 인터넷 화폐 같은 거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 일기를 읽고, 나는 친구들의 시를 읽었다. 그러다가 친구들도 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일기를 읽었다. 한때 우리는 시보다 일기를 더 사랑했다. 나는 친구들의 일기를 읽으면서 일기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일기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선한 면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친구들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의 영혼이 친구들의 영혼과 미묘하게 뒤섞이면서 나는 약간 내가 아니게 되고, 친구들도 약간 그 자신이 아니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뒤섞였다. 친구들이 두고 간 물건으로 어질러진 나의 방처럼, 온전한 자기만의 방이란 건 없고, 하나의 방은 사실 여러 개의 방을 품고 있듯이.     


사실 나에게 에세이는 일기와 같은데, 이 둘을 분리하는 순간 주제와 의도를 갖고 글을 써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히곤 한다.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면 아무거나 쓰면 될 것 같은데, 에세이를 쓰려면 아무거나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끙끙대다가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그래서 에세이를 써야 할 때도 일기를 쓰자고 생각하며 공책을 편다. 그렇게 아무거나 쓰다 보면 어느 날 그 글은 소설이 되기도, 시가 되기도 한다. 일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일기가 집이라면 소설이나 시는 방이다. 일기라는 집에 살면 언제든 소설이라는 방으로, 시라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새벽 3시 반. 나는 일기장을 책상 가장자리로 밀어 넣고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 영어를 하려고. 새벽에는 외로우니까. 사람이 고파서 새벽 3시에 전화영어를 한다. 예전엔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전화영어를 했는데 이제는 새벽에 한다. 새벽엔 친구들도 자서 전화를 걸 수 없으니까. 그런데 새벽엔 필리핀 선생님들도 잔다. 그래서 아프리카 선생님과 통화한다. 시차 때문에 아프리카는 아직 저녁이다. ‘굿 이브닝~’ 아프리카 선생님이 날 반긴다. 그러면 나는 새벽에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이 북적한 퇴근길에 합류한 것만 같고, 내 인생도 굿 이브닝인 것 같고, 왠지.. 왠지 혼자가 아닌 것만 같다.      


나는 ③으로 이동해 누워서 전화를 받았다. "헬로~~" 우리는 하루에 한 편씩 데일리 뉴스를 읽는다. 오늘 내가 고른 데일리 뉴스는 <눈물 모양 집에서 하룻밤 보내기> (spend a night among the trees in a teardrop tent). 나무에 매달린 눈물 모양의 텐트에 관한 뉴스다. 네덜란드 예술가 드레 와페나르의 걸이형 텐트는 바닥은 둥글고 꼭지는 뾰족한 눈물 모양이며 나무에 매달려 있다. 사다리를 이용해 눈물 속으로 들어가 먹고 자고 싸고 출근할 수 있다. 게다가 눈물의 집에는 창문이 있어서, 원하면 눈물 속에서도 세상을 내다볼 수 있으며 햇빛을 쐬거나 환기를 할 수도 있다. 새벽 4시. 나는 눈물 속에서 먹고 자고 싸는 삶을 상상한다. 누가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게 집이 된다면...사람들이 눈물로 집을 짓는다면... 누군가 내가 흘린 눈물에 산다면, 온갖 주택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이다. 눈물의 집은 소재가 유연해서 안에 있는 사람이 움직이고 뒤척임에 따라 집의 모양과 형태가 변한다. 방이 나의 컨디션과 상태를 반영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다. 마치, 나의 일기장과 같이 내가 살아가는 모양에 따라 형태를 달리한다. 와페나르는 그의 텐트를 대중에게 판매하지 않기로 했지만, 보르글룬 시는 방문객들이 눈물에서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한다. 눈물에서 자는 비용은 1박에 83달러부터 시작. 눈물은 최대 4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어른 둘, 아이 둘. 그러나 그들이 사다리를 타고 모두 빠져나가면 눈물은 텅 빈 혼자가 된다. 그러므로 눈물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우리는 눈물 속에서 살아야 한다.      


“남은 저녁 시간 잘 보내~” 아프리카 선생님이 내게 말한다. 고마워. 나는 답한다. 전화를 마치고 잠이 올 때까지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눈물 집에 관한 일기를 썼다. 내 방이 눈물 모양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러면 사는 내내 웅크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최종 취침 시간 : 6시 12분.          

* article by Wendell T. Harrison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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