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1.정확한 영화인 사랑의 실험
전체 페이지 2/3를 읽고 나서야 이 기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책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인에, 영화인에 의한, 영화인을 위한 책! 저자의 장엄한 연설에 굴종한 건지, 그의 압도적인 지식에 뇌 과부하로 항복했습니다. 꾹꾹 눌러 담은 평론에 스페인 파밀리아 성당을 처음 봤을 때와 같은 경외감을 느끼고 고개를 조아리며 두 손을 모았습니다. 제발 완독 하게 구원해 주소서.
CGV 스크린에 등판한 상업 영화만 봐 온 나에게 저자가 소개한 작품들은 굉장히 낯설어 이 책에 적힌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허리를 고쳐 잡고 영화를 다 관람해야 합니다. 목차와 내용에 언급된 영화 리스트 중 90%가 모르는 제목이란 사실을 깨닫고 또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영화는 갑자기 짧게 떠나는 번개 여행입니다. 전공을 잘못 골랐네요. 영화를 다 볼 시간에 이 사람이 쓴 다른 문학평론 책을 보겠노라 그리고 영화에 관한 깊은 이해를 포기했노라. 이 책의 제목을 바꿔 '정확한 영화인 사랑의 실험'으로 부르렵니다. 영화에 진심인 사람들에게 빛을 더 볼 책이거든요. 저자가 평론계의 아이돌이라는 불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니깐요.
#2.평론의 가치를 생각해 보다
이 책에 고마운 점은 평론이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을 알려주었다는 겁니다. 사실 전 비평과 평론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둘 다 누군가의 생각이 정리된 실체를 접하고 그 결함이나 아쉬운 점을 발견해 자신의 생각을 채워 넣고 평점을 내리는 게 결이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공격이 훨씬 쉬워 보이는 세계에서 '비평하지 말고 평론해라. 잘 봐. 평론이란 이런 거다. 애송이들아'라고 말하니 이 매력적인 기사님이 운전하는 버스에 기꺼이 올라탑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입덕 부정기인가요?) 인상 깊었던 구절 몇 개 긁어왔습니다.
-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 건 심리적으로 건) 떠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 통과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죽여버리기도 한다. 지금 나의 내면에도 누군가의 벨트, 누군가의 블라우스, 누군가의 구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다. 잊지 않으면 그 미성숙의 시공간을 떠나올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 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3.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첫 시작은 영화를 좀 더 제대로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기대를 많이 했었고 영화를 보고 나선 놓친 게 없을까 더 알고 싶은 욕심에 읽어나갔습니다. 어느덧 완주가 다가오니 영화를 제대로 보는 정답을 애써 찾으려 했던 거 같습니다. 그냥 요즘 드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는 게 최고가 아닐까 해요. 와인을 공부하면 섹시해 보이고 소주를 공부하면 없어 보이는 걸까요? 글쎄요. 자기가 즐기면 그게 나름 하나의 의미가 아닐까요? 얼마 전 같이 연극을 보다가 슬픈 내용에 공감해서 우는 남자를 봤습니다. 조금 의아해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닌데? 그렇습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영화는 없습니다.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는 CG도, 생각지도 못한 소재도, 빵빵 터지게 하는 코믹도, 노잼노펀한 다큐도.. 날 웃고 울리게 하는 모든 게 삶에 있어서 없어서 안될 요소들입니다. 영화를 계속 볼 거예요. 평론을 넘어 가슴 벅차 감동하는 그 감정을 함께 느끼고 싶거든요.
한줄평 : 진짜 영화인이라고 자부한다면 한 번 도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