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차 한잔 같은 영화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리뷰, 최진영 감독

by 고독일기




엔딩 같지 않은 엔딩..



# 영화가 어느새 끝났다


처음에 소소한 일상을 풀어가는 영화답게 지루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예상했었습니다만, 어느새 엔딩 크레디트가 떠올라있더군요. 별거 아닌듯해 보이는 내용으로 어떻게 2시간 가까운 시간을 '삭제' 시켰는지 신기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입에서 씀씀한 맛이 살아나 영화를 되새김해 보니 딱히 모나지 않는 이야기라 그런지 무장해제가 된 거 같습니다. 요즘같이 화려한 이펙트가 떡칠된 영화도 아니고, 마블 영화처럼 세계관을 알아야 더 재미를 발견하는 피로감이 없는 어디서 있을 법한 인물과 이야기가 편하게 느껴져 영화를 오래간만에 안락하게 봤습니다. 편의점에 있는 인스턴트 음식만 먹다가 어머니가 해준 된장국을 먹은 듯 구수했습니다.



# 번개 같이 등장한 그녀, 과거의 나


영화는 황당하게도 주인공이 번개를 맞고 나서부터 본 궤도에 오릅니다. 집에서 있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하는 주인공은 이야기하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번개를 맞은 사건으로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과거로 옮겨다 줍니다. 학창 시절에서 다한증이 심한 그녀는 어디서든 소외받는 존재였습니다. 오갈 데 없는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고작 한편의 다락방이었죠. 친척과 같이 살고 있지만 회식에는 언제나 빠져있고, 제3자로 취급받아서 올바르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어요. 부엌에서 라면을 서서 먹는 장면에서는 왠지 모를 뭉클함이 생겼어요.



# 그래도 사랑하며 살아간다.


남들처럼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서 소외받은 그녀는 심리치료라는 프로그램에 우연히 참여합니다. 말더듬증이 심한 남자 주인공을 만나고 두 사람은 연인으로 지내죠. 사람은 역시 함께 살아가야 하나 봐요. 심리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들은 강원도 세미나에 가서 데이트를 하려고 연수비를 기꺼이 냈습니다. 같이 여행 가서 새로운 세상을 볼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세상은 살기 쉽지 않다는 듯 이들은 사기를 당해버립니다. 하루 종일 마늘 까면서 번 돈을 몽땅 날린 그녀에게는 돈을 잃어서 아픈 거보다는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자책하고 남자 주인공이 자신을 동정하는 시선에 이별을 선언합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화가 날 법만 한데 여주인공 캐릭터는 끝내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소외감을 느낀 그녀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감정을 스스로 억눌러서 그런지 화보다는 자기 경멸하는 표정으로 마음을 정리합니다. (유일하게 격정적으로 감정 표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은 그녀가 지켜려고 했던 모든 것이었기에 영화를 보면 잘 느껴집니다. 글로 전달하긴 어렵네요.)



# 태어나길 잘했어, 보길 잘했어


영화를 보면서 간간이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소외감을 느끼는 주인공, 혁명과 사랑에 실패한 사촌 오빠, 가부장적인 집에서 하는 부부 싸움, 아무 말 없이 아들을 지지하고 밥을 하라고 하는 시어머니, 스트레스에 못 이겨 담배 피우는 사람들. 장면과 캐릭터마다 어딘가에 있을 법합니다. 아니지. 오히려 과거에 제가 겪었던 경험들이 소환한 느낌입니다. 그런 불편함을 견뎌내고 지금도 살아온 너를 보라고 감독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그녀가 관객을 쳐다보며 말하는 듯한 구도에서 말합니다. "태어나길 잘했어." 잔잔한 엔딩에는 명확하게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는 어떤 사이다 같은 장면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오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라고 토닥여 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줄평 : 힐링이 별거냐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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