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불행해질 권리가 있어요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를 읽고

by 고독일기



멋진 신세계, 멋져 보이는 그 세계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었다. 북, 북서, 북동. 방향을 잃은 한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그의 순수한 영혼은 다른 사람들의 농담거리로 전락시켜 버는 모습은 흡사 오늘날 SNS에서 가짜 뉴스와 마녀사냥이 떠오른다. 그들만의 멋진 신세계가 아닌 고통을 택한 야만인은 완전히 자유로울까?



어쩌면 그는 독립을 결심한 그 순간조차 도구들을 소비하면서 이미 패배를 인정하고 수치심을 느꼈을 거다. 그가 여생으로 택한 장소가 예전에 살던 곳이 아니라 한적한 등대에서 밭을 일궈나가려던 건 이곳, 저곳의 문화에서도 배척당하는 자신의 정체성 혼란으로 택한 제3의 영역일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남과 다른 길을 택했다고 한낱 유희 거리로 치부되어 사회적 매장을 당하는 건 예상치 못했나 보다.



완전한 연결도 완전한 단절도 아닌 어설픈 연결은 외로운 그가 택한 마지막 선택지였겠지. 감시와 통제가 쉬운 사회가 되어가는 걸 느낀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알고리즘은 계속해서 나를 자극한다. 이슈거리가 있으면 금세 사람들은 몰려들고 물고 뜯고 맛보고 싸우고 진실은 왜곡 혹은 와전되어 메타버스, 가상공간은 그 본질은 이미 중요하지 않고 누군가는 피를 봐야 끝이 나는 콜로세움으로 전락해버렸다.



미래는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악용되는지 극단적으로 묘사해 주어서 인상 깊었다. '어머니'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느끼는 모성애를 배척하고 유전자 조합과 각종 최면 학습이라는 철저히 분업화된 양육시스템으로 미래의 안정을 위해 길들이는 건 어떻게 보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험관 아이를 기르고, 모유보다 분유를 택하고, 젖을 떼기 무섭게 아이가 자라면 국가가 지정한 보육원으로 아이에게 양육을 맡긴다. 리처드 호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책이 떠오른다.



인간 간의 유전자 차이는 어느새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고,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은 유전자가 전부인 양 다른 사람을 판단해버리고 안정적인 위계질서를 확립시킨다. 사실상 신분제 사회를 위해 그들은 철저히 올바르게 길러져야 하는 감정들을 애초의 시작점인 모성애부터 단절시켜 그 관련 단어를 언급하는 행위조차 음탕하다고 터부시 해버린다. 사회 시스템의 안정을 위한 효율을 위해서는 감정 따윈 사 치니깐 말이다. 불안정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소마'가 주는 쾌락으로 맞바꾸고 나는 행복하다고 작위적 이성으로 자위하는 모습들은 약간 헛구역질이 난다.



너무나 과학과 기술이 악용된 사회라 가치관의 혼란이랄까 내가 불안정해질 지경이다.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지만 소외된 누군가에는 디스토피아 일지도? 아니면 서로 간 아예 교류가 없는 선택적 '고립'과 '무지'가 오히려 행복일까. 분명히 멋진 신세계.. 아니 멋져 보이는 신세계는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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