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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Apr 06. 2024

봄날은 간다

고향 친구의 딸이 결혼한다. 경산에서 구미행 기차를 탔다. 벚꽃 흩날리는 4월에는 기차를 타는 것도 즐겁다. 가는 길이 온통 눈 호강이다. 게다가 레일 위의 무궁화호는 참 적당한, 봄의 속도로 달린다. 검은 기둥과 잔가지 사이에서 봉긋봉긋 피어난 벚꽃들이 선명하고도 환하게 다가온다. 세상의 온도를 거부하는 갱년기 아줌마의 마음을 꽃잎들이 먼저 사르륵 훑고 지나간다. 열과 냉을 수시로 오가는 친구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부채와 핫팩이 동시에 필요한 쉰을 넘은 나이는 오늘처럼 장거리 이동이 대략 난감하다. 더웠다 추웠다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내 몸에서 나는 쉰내를 고스란히 맡아야 한다.

    

구미역은 한산하다. 4월이 아닌가. 봄의 수인들은 이미 금오산으로 향했을 것이다. 따스한 봄햇살이 역사를 감싼다. 고민하다 두고 온 선글라스 생각이 살짝 났다. 반소매를 입은 청춘들이 제대로 봄 마중을 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봄스럽다.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라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다. 쉰내의 처방전 같은 저 햇살이 주삿바늘처럼 내 눈을, 내 몸을 콕콕 찌른다. 강렬한 오후의 햇살에 얼른 택시를 타고 예식장으로 향했다.  

   

친구는 오후 2시의 예식을 앞두고 고운 한복 차림으로 손님들을 맞는다. 아름답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친구의 모습. '사부인', '안사돈', '장모님' 등의 호칭이 아직은 어색한 시점. 열여섯의 어느 시절에 만났던 우리들의 시간이 30년도 더 지난 오늘에 보니 친구의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다 세월을 거스르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의 뇌는 과거의 그 시간을 박제해서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된 엄마, 엄마가 된 우리, 청년이 된 딸들을 한자리에서 보니 우리 모두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한다.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곧 할머니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식장 안의 풍경도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일렬종대와 횡대로 나열하였던 의자는 없고 원탁형 자리와 신부와 신랑이 걸어가는 통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자리가 있다. 덥석 통로 쪽 자리에 앉고 보니 하객들끼리 마주 보는 모양새다. 맞은편에 또 한 무리가 앉았다. 내 눈에 비친 저들의 나이와 저들의 눈에 비친 나의 나이는 정확할까? 내가 바라보는 저들의 나이 듦과 저들이 바라보는 나의 나이 듦은 원만한 것일까? 세월을 조금이라도 거스르고 싶은 마음과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시간이다. 하객들을 보며 내 나이와 내 모습이 어디쯤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행진곡도 클래식보다 팝이다. 관습처럼 울려 퍼졌던 예전의 결혼행진곡은 구석기 유물이 된 지 오래다. MZ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세대들은 모든 음악을 수용할 줄 알고 어떤 음악도 소화해 낸다. 오늘의 곡들도 신나고 흥겨웠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점점 제대로 인식되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앞으로는 상상 초월의 음악과 예복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 잔뜩 기대되는 풍경 아닌가. 내 나이 쉰을 넘었으나 은근슬쩍 그들의 속도쯤 넉넉히 맞출 수 있다고 슬며시 내 숟가락도 얹어 본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혼식에서 변하지 않는 건 새 가정을 이루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다. 쳐다만 봐도 좋은 때가 오늘부터 시작이다.


식을 마치고 다시 구미역으로 향한다. 편하게 입고 왔음에도 피곤이 몰려온다. 말도 줄고 바깥의 풍경도 잠시 쉬어간다. 나이 앞에 어쩔 수 없는 체력의 한계는 봄날의 숙취보다 강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쏟아지는 잠에 몸을 맡긴다. 오수(午睡)는 중년의 남은 하루를 버티게 하는 튼튼한 근육이자 강력한 쇠심줄이다. 짧은 시간이 서너 시간처럼 흘러간다. 나의 몸과 정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쉼을 누린다. 이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 일어선다.     


뚜벅뚜벅. 벚나무 사이를 걷는다. 유록색의 새순들이 발버둥 치는 풍경이 다시 시선을 사로잡는다. 경산에서 구미까지, 그리고 구미에서 경산까지 온통 흩날렸던 꽃잎들을, 나는 지금 글들의 책갈피에 고이 꽂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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