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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연필처럼

by 글똥

오후 한 시, 출근하는 내 손엔 늘 빨강과 파랑 색연필이 있다. 색연필로 아이들이 푼 문제를 채점도 하고 수정도 하고 잘했다고 큰 동그라미도 그려 준다. 30대 중반에 시작한 일이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결혼 전에는 없었던 장기 직장의 역사다. 직장인의 서사를 써 내려간 힘은 주부와 엄마, 아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를 찾고 싶은 간절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는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송쌤'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내 심장을 관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나는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는 많은 것이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된다. 그리고 작은 몸짓과 손짓 하나의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리게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보는 교사가 되라는 스무 살의 전공 수업은 결혼이라는 공백의 십 년을 가뿐히 넘어 다시 나의 교육 현장에서 매일의 기쁜 쓸모가 되었다.

빗금과 동그라미와 세모는 내가 아이들의 문제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선들이다. 빗금은 틀렸다는 표시다. 아이들은 그 작대기에 매우 속상해한다. 반대로 맞았다는 동그라미에는 모두 좋아한다. 게다가 작은 하트 하나라도 그려 주면 입꼬리까지 올라간다. 단순한 도형 두 어 개가 아이들의 기분을 좌우한다. 아이들의 표정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을 건너면서 나는 사수하던 사선의 필요가치에 마음을 비우게 됐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모나미 빨간 볼펜을 박스로 샀다. 채점과 수정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좁은 행간과 자간에 정확한 전달을 하기에는 0.7 모나미가 매우 적합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랐다. 쫘악 그어대는 사선의 빗금이 울리는 소리가 채찍 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이 뜨끔하고 아프다 했다.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이들 입에서 빗금을 그을 때마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들과 달리 사선은 나의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까스활명수’였다. 쫘악 쫘악 소리는 ‘명쾌 상쾌 통쾌’를 외치며 신나게 노래하는 나만의 악보였다. 아이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유일한 시간, 게다가 그 사선 앞에서 아이들은 나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사선은 필요악이었다. 그날따라 말 안 듣는 고집불통 아이에게는 손 끝에 힘을 모아 더욱 세게 그어댔다. 힘을 견디지 못한 종이가 때때로 찢어지기도 했다. 빨간 모나미 볼펜은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천리마처럼 휙휙 종이를 뚫고 마지막까지 의기양양했다. 거침없는 사선이 많을수록 아이들은 꼼짝없이 나의 포로가 되었다고 여겼다.

'거인의 정원'이라는 동화가 있다.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거인은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싫어 담을 높이 쌓는다. 그러나 그때부터 거인의 정원은 황폐해졌다. 울고 있는 한 아이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을 때 정원은 다시 꽃을 피우고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한다. 

색연필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그러나 색연필을 사용하니 어디가 틀렸는지 무엇을 더 적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알려 주기가 힘들었다. 행간과 자간을 비집고 정확한 자리에 필요한 낱말과 숫자를 기록하기에 색연필은 너무 굵었다. 게다가 스프링으로 돌돌 말려있는 색연필은 쓰다 보면 자꾸 안으로 들어가 자주 끝을 돌려 다시 끄집어내야 했다. 급할 때는 너무 많이 돌려서 쓰다 보니 색연필이 툭 부러지기도 했다.

색연필은 볼펜보다 굵다. 마치 중년으로 접어든 나의 허리둘레처럼. 젊은 시절, 나는 50킬로그램을 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친구 남편은 나를 '목 돌아간 여인'으로 부를 만큼 가슴조차도 말라 앞뒤 구분이 힘들었다. 볼펜처럼 얍삽한 몸매에서 색연필처럼 안정감 있는 지금의 나는 곧 60킬로그램을 찍을 예정이다. 친구들은 피골이 상접했던 예전의 나를 기억한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말 걸기가 힘들어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살이 붙기 시작하면서 체력도 많이 좋아졌다. 예민하던 성격도 제법 두루뭉술해졌다. 살이 찌면서 삶의 패턴도 바뀌었다. 이제 친구들의 뼈 때리는 농담에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몸무게와 성격이 반드시 비례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 살아온 날들이 켜켜이 쌓인 덕분이라고 하자. 쉰을 훌쩍 넘었으니 이제 모든 일에 한쪽 눈은 감고 넘어가야 할 게 더 많아지기도 했다. 이미 나는 급히 서두르다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너무 미루다 놓쳐 버리기도 했다. 모든 인연과 관계가 시절이라기보다 삶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날카롭고 치열한 젊은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볼펜의 서걱거리는 날 것의 소리처럼 말이다.

색연필 채점은 생각보다 부드럽다. 사선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거칠지 않다. 종이를 찢고 반항하는 볼펜은 있어도 색연필은 대체로 유연하게 모든 선을 완성한다. 빨강과 파랑의 입자가 종이 위에서 미끄럼을 탄다. 색연필은 종이의 속살을 후벼 파지 않는다. 꼭 쥐어야 본연의 성질을 드러내는 볼펜과 달리 힘을 주면 오히려 제 몸이 부러진다. 나도 마찬가지다. 늙어가는 몸에 성질을 내 봐야 나만 힘들다. 몸에 적당히 힘을 빼고 살아야 색연필처럼 세상에 스며 편안하게 살 수가 있다.

아이들이 가끔 내 색연필을 가져간다. 그리고 종이에 하트를 그리고 색칠한다. 나뒹구는 색연필이 그렇게 많아도 꼭 수업 시간에 내 것을 탐한다. 결혼 전, 유치원에서 일할 때 내 이름이 적힌 볼펜 쓰기가 무서웠다는 동료가 있었다. 내 것을 매우 특별하게 관리했던 나는 내 물건에 누가 손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사용 후 정확한 반납이 되지 않았던 경험도 불쾌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고 난 빨강과 파랑 색연필을 무심결에 자기 필통에 넣는다. 나는 그게 사라진 것도 모르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색연필 실종 신고를 낸다.

다시 아이들과 마주한다. 아이의 필통에서 나온 색연필을 쥐고서 오늘도 나는 빗금과 세모와 동그라미를 그린다. 부드럽고 매끈한 파랑과 빨강의 선들이 나의 하루를 굵직하게 완성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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